화약이 처음 만들어진 곳은 어디인가요?
화약이 처음 개발되어 사용된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요? 과거 조선에서도 화약을 사용했지만 화약은 외국에서 제조법이 건너온 것으로 아는데 어디인가요?
중국에서 기원후 2세기 한나라 때 이후 지속돼온 중국의 화학, 즉 '연단술'과
관련이 깊다.
고대 중국 설화집인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의하면, 후한시대인 기원후 2세기,
단약을 만드는 어떤 방사의 집에서 큰 불이 일어나 화염이 지붕까지 미쳐
집 전체가 한꺼번에 불탔다는 내용이 있다.
이미 이 당시부터 화약연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3세기 서진의 연단술사인 정사원(鄭思遠)이란 인물이 지은
진원묘도요약(眞元妙道要略)이란 저술에서 초석과 유황 유합물의 화재위험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일찍부터 흑색화약 및 화학물질 혼합 실험이 활발하게 전개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포나 소형총기에 쓰인 흑색화약은 7세기 당나라 초기에 '손사막(孫思邈)'이란 전설적인 의사가
유황과 목탄, 초석을 섞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실크로드 교역길이 활발해지면서 12~13세기 이슬람 상인들이 송나라와 거래하며
화약 및 화학약품 기술을 습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1248년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醫師 이븐 알바이타르(Ibn al Baythar)의 기록에서
흑색화약의 주 원료 중 하나인 초석을 '중국의 눈(Chinese Snow)'이라 소개했다고 알려져있다.
중국이 개발했던 독가스 무기나 기타 화학무기 만 아니라 흑색화약 역시 대량의 연기를 발생시키고
많은 재를 한꺼번에 일으켜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한꺼번에 대포 사격 등을 할 경우엔 질식 위험도 있었다.
무연화약이 발명된 19세기 말까지 유럽 각국의 군복이 화려한 원색의 옷이었던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
지금까지는 화약이 중국 당나라에서 8세기에 세계최초로 발명되어
송나라와 원나라에 걸쳐 명나라 때 이론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문헌 기록상으로는 당나라 덕종 흥원(興元) 원년(784)에 이희렬(李希烈) 반란군이 사용한
‘방사책’(方士策)이 화기의 최초 사용으로 간주된다.
《신당서》〈이희렬전〉에 의하면 변(현 開封)에서 황제를 참칭하고
국호를 초(楚)라고 한 이희렬은 반군을 이끌고 유흡(劉洽)이 사수하는
송주(宋州, 현 商邱)를 공파할 때 ‘방사책’으로 병영과 성벽 위의 방어물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방사책의 실체는 밝혀진 것이 없으나, 화약에 의한 화공법(火攻法)으로 일종의 화기로 추정한다.
조선시대에 출간된 《융원필비》에는 충전뢰, 화뢰포라는 폭탄 원리에 의한 화약무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학자들은 이 시기를 삼국시대의 북한산성 전투를 근거로 든다. 661년이라면 기원전 7세기로 중국보다 먼저 화약을 사용한 화약무기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화약이 중국 당나라에서 8세기에 세계최초로 발명되어 송나라와 원나라에 걸쳐 명나라 때 이론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문헌 기록상으로는 당나라 덕종 흥원(興元) 원년(784)에 이희렬(李希烈) 반란군이 사용한 ‘방사책’(方士策)이 화기의 최초 사용으로 간주된다.《신당서》〈이희렬전〉에 의하면 변(현 開封)에서 황제를 참칭하고 국호를 초(楚)라고 한 이희렬은 반군을 이끌고 유흡(劉洽)이 사수하는 송주(宋州, 현 商邱)를 공파할 때 ‘방사책’으로 병영과 성벽 위의 방어물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방사책의 실체는 밝혀진 것이 없으나, 화약에 의한 화공법(火攻法)으로 일종의 화기로 추정한다.
벼락이라는 뜻으로 보아 화약무기로 볼 수 있다.중세에는 화약무기에 의해 생겨나는 불을 ‘뛰는 불’ ‘번개’ ‘벼락’ ‘광요’ ‘별’ 등으로 표현하고 화약무기의 구조 및 작용 원리를 ‘신술’ ‘신법’ 등으로 표현하였으며 화약무기를 ‘신기’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의 화약과 화포의 발달 상황은 여러 문헌에도 나타나 있다. 《세조실록》에는 화포가 신라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려 때 정비되고 조선시대에 와서 완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사》에 의하면 덕종 1년(1032)에 박원작이 만든 팔우노, 수질노, 뇌등석포를 비롯한 24종의 무기를 성에 비치하도록 했다고 한다.
고려 때는 거란, 여진, 몽고, 왜구들과의 전쟁이 빈번했으므로 새로운 무기가 많이 사용되었다. 《고려사》에는 김부의가 1123∼27년 왕에게 서울과 지방에 화전(火筒)과 같은 무기를 배치할 것을 제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전이란 화약의 힘으로 날아가는 불화살을 의미한다. 특히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서경공방전(1135∼36)에서 조언이 설계한 포기(砲機)를 흙산에 설치하고 중량이 수백 근 되는 돌탄을 쏴서 성루를 부수고 화구(火毬)를 던져 불을 지르니 적들이 흙산에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수백 근의 무게를 가진 돌을 수십, 수백 m의 거리 밖으로 쏘는 것은 완구포와 같은 화약무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전투에 사용될 정도로 화약과 화포의 기술이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정치 상황에 의해 무기제작 기술은 퇴보하기 시작한다. 고려 말기에 군인들을 경시하던 세월이 지속되면서 1308년에는 군기시(무기제작 기관)가 폐지됐고, 1343년에는 훈련장마저 없앴다. 당연히 화약과 화약무기 기술은 사라지게 된다.
14세기 말이 되면서 고려의 주변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준동하고 남쪽에서는 왜구가 자주 침입, 이들을 격퇴할 무기개발이 절실해지자 최무선이 등장하여 화약의 국산화에 성공한다. 이어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만드는 화통도감(火筒都監)에서 17종의 화약무기를 개발한다. 최무선은 당시 고려 정부를 어지럽히던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군함에 화포를 장착하여 왜구를 근원적으로 소탕했고, 대마도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게 한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들어와 화약무기는 더더욱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