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정척사 사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 후기였다. 조선 사회에 점점 서학이 퍼져가자, 성리학자들은 충효나 예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서학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위정척사 사상이다. ‘위정척사(衛正斥邪)’란 올바른 것(정)을 지키고 나쁜 것(사)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올바른 것은 조선의 전통이고 나쁜 것은 서학을 비롯한 서양 문화인 셈이다. 조선 조정도 이들의 주장을 지지했다.
19세기 중반에는 한반도 주변에 서양의 배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는데, 위정척사 사상은 서양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바뀌었다.
조선보다 먼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자, 유생들은 일본도 서양과 똑같다며 반대했다.
이들은 서양과 통상을 하게 되면 천주교의 전파를 막을 수 없어서 조선의 풍속이나 사회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서양의 공산품이 밀려들고 조선의 농산물이 빠져나가면 조선이 경제적으로 커다란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흥선 대원군에 이어 권력을 잡은 민씨 정권이 문호를 개방한 뒤에 개화 정책을 추진하자, 유생들은 전국적으로 들고일어나 조정을 비판했다.
하지만 유생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은 개화 정책을 계속했고, 서양의 문물과 일본 세력이 밀려들었다.
특히 일본은 조선의 정치에 깊이 간섭했는데,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까지 내려지자 유생들은 항일 의병을 일으켰다.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의 명령으로 잠시 주춤했던 유생들의 의병 활동은 을사조약을 계기로 다시 확산되었다가 이후에는 차츰 쇠퇴했다.
출처 : 한국사 사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