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위정 척사 운동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도 물론 있었습니다. 많은 유생들은 일본을 서양 세력과 동일시하여 오랑캐라 여기며, 그들과 교역하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운동을 ‘위정척사 운동’이라고 합니다.
위정척사(衛正斥邪)란 ‘바른 것(正)을 지키고(衛), 사악한 것(邪)을 배척(斥)한다.’는 뜻입니다
이 운동의 뿌리는 상당히 깊어. 1860년대 서양 선박들이 우리나라 해안가에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해 왔을 때, 많은 유생들이 서양 세력과의 교역에 반대했습니다. 1870년대에는 일본의 개항 요구에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이 일본 놈들이나 서양 놈들은 모두 한통속이라는 ‘왜양일체론’을 내세우며 개항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보수파 유생의 우두머리 최익현은 정부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이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일본과 조약을 맺으려면 자신의 목을 도끼로 치고하라는 의미에서 허리춤에 도끼를 차고 대궐 앞에서 항의 농성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체결되었고, 정부는 개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갔어. 위정척사파들은 정부의 개화 정책추진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임금에게 개화 정책 추진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상소를 빈번하게 올리며 항의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반대 운동이 영남 만인소 사건입니다.위정척사사상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벽이론에 바탕한 새로운 유교적 정치윤리사상입니다.
여진족의 핍박을 받던 남송에서 주자가 민족적 화이의식을 근간으로 하여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로 이민족을 응징할 것을 역설하며 체계화한 사상입니다. 중국 중심의 화이적 보수성과 배타성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세동점의 여파로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유교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고유의 위정척사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항로를 비롯한 유학자들은 보수적인 화이사상을 극복·지양하여, 민족주체성을 확립하는 민족주의사상으로 승화시켰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세기 반외세 투쟁을 전개한 위정척사운동은 정학인 성리학은 지키고 사학인 천주학은 물리친다는 의미로 자주민족정신과 의리정신 호국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후에 의병활동으로 이어집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정척사 또는 척사위정은 조선 말기에 일어난 사회운동으로,정학인 성리학과 정도인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사학으로 보아서 배격하는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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