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와 한국은 밀접한 관계인가요?
요즘 뉴스에서 연일 우크라이나 와 러시아의 전쟁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나라와 우크라이나가 밀접한 관계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쫀쫀한사마귀265입니다.
과거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 당시에는 카자크들이 주로 활약하였다. 루스 차르국이 시베리아를 개척하고 청나라 국경을 탐사할 당시 탐사대의 주력은 카자크로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과 교전한 러시아군 역시 카자크였다.
카자크 외에도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를 건너 외만주도 개척할 무렵,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활동을 하다가 정치적 이유로 유배, 정치적 수용소 등으로 강제이주되거나 경제적 이유로 땅을 개척하러 온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등등도 적지는 않았다. 오늘날에도 연해주의 러시아인들 중에는 우크라이나계 성씨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편이기도 하다. 훗날 외만주에 정착한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 땅에 젤레나 우크라이나를 세워 러시아 내전 때 소련 볼셰비키 정권에 저항한 적도 있었지만 적군에 패배하여 훗날 소련령 만주 또는 러시아 만주가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근대 연해주에도 상당한 수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정착하여 한국인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1920~22년에는 연해주에 젤레나 우크라이나가 들어서 현지 고려인들에게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 외에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만주의 하르빈 역시 고골 거리라는 이름의 우크라이나인 밀집 거주 지역이 있었을 정도로 우크라이나인 인구가 적지 않았다. 1931년 기준 하르빈에 거주했던 우크라이나계 인구는 2~3만여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한 때 번성했던 하르빈의 동유럽인 커뮤니티는 일본 제국이 하르빈에 731 부대를 건설하고 임산부 포함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진행하면서 큰 위협을 받고[ 대다수는 일제의 만행을 피해 상하이를 거쳐 미국, 호주 등으로 탈주하였다. 20세기 초반 하르빈에 건설된 시나고그는 오늘날 하르빈 조선족들의 학교로 개조되었다.
1922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으로 백군 난민 9,000여 명이 피난하였는데#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우크라이나계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물론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에 정착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출신 난민들은 링크된 논문에 의하면 6.25 당시 소련군에 의해 소련으로 납치되었고, 오늘날 한국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 해체 이후 한국에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안녕하세요. 모던한셰퍼드125입니다.
전혀가깝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 잘모르듯이 우크라또한 대한민국 역사를 잘모릅니다 그들에게 아시아는 중국,일본입니다
단지 곡물등 한국이 필요한 제품만 저희가 수입하고 있으나 이또한 미비합니다
앞으로 계속적인관심과 교류를 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