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을 비롯한 민씨척족정권이 개화정책을 추진해 일본과 구미제국과의 교섭통상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심해지고 있었고 이런 가운데 개화파 관료가 제도 개혁에 따라 대거 등장하자 수구파의 반발이 격화됩니다.
특히 5영을 폐지한 후 무위, 장어 의 2영을 설치하고 별기군을 창설하는 등 군제 개혁이 단행되자 구 5영소속 군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1881년 전개된 수구파의 위정척사론과 이재선, 안기영 등의 토왜반정음모사건을 계기로 민씨척족정권은 대우너군파와 특히 남인계열의 수구파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함으로써 지배층의 분열은 극에 달합니다.
이 밖에 민씨척족정권의 인사행정의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패, 국고의 낭비 ,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인한 불만 등을 군란의 배경으로 들수 있습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수차례 군병들의 반항이 있었고, 1863년 금위영 소속 군병의 소요, 1877년 8월 훈국병 소요 등은 모두 군료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도 군료문제 입니다.
군제 개혁 후 구 5영 소속 군병의 대부분은 실직했고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개편된 군병도 신설된 별기군에 비해 열악한 대우를 받습니다.
더욱이 이들 구 5영소속의 군병들은 13개월이나 군료를 받지 못해 불만이 절정이었고 특히 그들은 군료 관리인 선혜청당상 민겸호와 전 당상이었던 경기관찰사 김보현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있었는데 1882년 6월 초 전라도조미가 조착, 6월 5일 도봉소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구훈련도감 군병들에게 한달분의 군료를 지급하나 겨와 모레가 섞였고 양도 모자랐습니다.
이때 포수 김춘영, 유복만 등이 선혜청 고직과 무위영 영관에게 항의해 시비가 격렬해졌고, 이에 다른 군별들도 합세해 도봉소는 아수라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