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가 고려를 적대시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가 알고 있기로는 기황후는 고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모국인 고려에 칼을 겨눈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황후가 고려를 적대시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나라가 고려에서 여인들을 강탈해간 것은 무려 100여 년간 입니다. 몽골은 1225년(고종 12년)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고려에 침입하여 항복 조건으로 고려의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500명씩을 바치라고 하지요. 1231년(고종 18년)에는 원나라에 항복한 귀순병들에게 짝을 찾아준다는 구실로 공녀(貢女) 1000명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1274년(원종 15) 원나라는 또다시 공녀 140명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황후도 고랴라는 약소국에서 자신을 공녀도 원나라에 끌려오게 만들었으니 고려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들리 없었겠지요.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황후는 자신과 친정인 행주 기씨 가문의 잇속이 먼저였기 때문에 적대시했다기보다는 고려를 자기의 권력을 위해 이용하려 했다고 보는것이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황후도 당시 대국이었던 원나라에 때마다 바쳐야 했던 공녀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당시 원나라에 공녀로 바쳐진 고려 처녀들은 엄청난 곤욕을 치러야 했기에, 공녀로 차출된 후 치욕을 피하기 위해 목숨을 끊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공녀 기씨는 1333년 고려 출신 환관이던 고용보(高龍普)에 힘입어 원나라 왕실의 궁녀가 되었습니다. 당시 원나라 왕실에는 고용보와 같은 고려 출신 환관들이 많았는데, 이는 이민족 국가였던 원나라가 한족을 억제함과 동시에 지배 구조 유지에 꼭 필요한 지식인을 고려 환관을 통해 충당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고용보는 기씨를 순제의 차를 따르는 궁녀 자리에 앉혔습니다. 기씨에게는 치명적 매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순제는 곧바로 기씨를 총애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당연히 황후의 질투를 불렀습니다. 당시 순제의 제1황후였던 타나실리는 기씨에게 수시로 채찍질을 하고 인두로 살을 지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기씨가 순제의 총애를 받은지 2년째가 되던 1335년, 타나실리의 형제들이 순제에 반대하는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합니다. 이 사건으로 황후 타나실리도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벌을 받고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되어 출궁을 당하였으며 이후 사망합니다. 아마 여기까지는 드라마에서도 잘 다뤘을 겁니다.
기씨는 이후 1338년 아들 아이유시다라[愛猷識里答臘]를 낳고 1339년 메르키트 바얀이 실각하자 제2황후로 책봉됩니다. (제1황후는 메르키트 바얀의 딸로, 정쟁에 나서지 않는 성격 덕에 기씨와의 큰 마찰은 없었습니다)
1353년에는 황제를 압박하여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였고, 같은 고향 출신인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군사 책임자로 삼아 드디어 실권을 장악합니다. 그와 동시에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풍속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하죠. 한편 기씨가 원나라를 품에 안자 고려에 남은 그녀의 가족들도 덩달아 득세하기 시작합니다. 기씨의 오빠 기철이 그 대표주자인데, 원나라의 참지정사, 고려의 덕성부원군에 봉해지며 권력을 얻습니다.
그런데 기씨 집안이 저들의 힘을 고려의 부국강병에 이용했다면 그들은 아마 역사적 영웅으로 남았을 겁니다. 문제는 그 힘을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는 쪽으로 이용했다는 데 있었죠. 고려 조정은 결국 공민왕의 즉위 후 원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이들을 비밀리에 제거합니다. 기씨 역시 이에 대응하여 충선왕(忠宣王)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고려를 침공하지만, 당시 최영과 이성계로 대표되는 고려군은 손쉽게 원나라 군세를 격퇴합니다.
그러나 기씨는 무려 80년간 지속된 고려 공녀 차출을 중단시켜쓰며, 고려를 원나라의 한 개 주로 만들자는 논의도 기각시키는 등 나름의 조국에 대한 애정(?)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