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의 주도 인물과 활동, 성격, 의의 및 한계가 궁금합니다.
대부분 정동 구락부 인물들이 협회를 이끌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가 서로 나타나고요. 개혁으로 헌의 6조가 나오는데 고종은 찬성했나요? 독립협회의 주도 인물과 활동, 성격, 의의 및 한계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립협회는 189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다가 1898년 해산된 사회 정치 단체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 정치 단체로 독립문 건립 기구를 표방하여 창립된 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해산되었다. 자강을 통한 자주 독립을 주장하며, 내부에 황제권을 중심으로 한 점진적 개혁 노선과 관료에 의한 권력 독점을 지향한 노선이 병존하였다. 「헌의6조」를 제출하여 중추원관제 개편이라는 성과를 얻었으나, 구제(舊制) 복구를 주장하는 보수 세력의 반발을 받았고, 급진파의 과격한 활동을 황제권 강화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고종에 의해 해산되었다.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 공포로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고, 일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1896년(고종 33) 2월 11일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아관파천은 일본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데 동기가 있었지만, 국가 독립의 상징적 존재인 국왕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손상시켰을 뿐 아니라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자주권 회복, 정치적 혼란 수습, 국민 통합이 당면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국간섭(三國干涉)주1 이후 왕실과의 관련 하에 반일적 입장을 취하던 정동파(貞洞派)주2를 중심으로 한 내각은 정부 시책을 국민에게 알릴 수단으로 민간지의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이들은 서재필(徐載弼)의 『독립신문(獨立新聞)』의 창간[1896년 4월 7일] 및 그 배포를 적극 지원하였다.
1896년 3월 서재필을 신문 담당 부서인 농상공부의 임시고문관으로 취임하게 한 것도 적극적 지원의 한 가지 예로 꼽힌다. 이어서 독립협회가 창립되었다. 독립협회는 당초 독립문(獨立門)주3과 독립공원(獨立公園) 건립을 추진하기 위한 기구를 표방하였다.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손상된 군주 및 왕실 권위를 회복하려는 조치의 일환으로 독립문을 세워 세계 만국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보여주려는 독립협회의 창립을 허가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독립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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