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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21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독립 협회 는 서울에서 여러번 만민공동회를 개최 하였는데요.. 이러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게 된 배경과 이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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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민공동회는 1898년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여 자주 독립의 수호와 자유 민권의 신장을 위해 조직, 개최되었던 민중 대회입니다.

    러시아의 대한제국을 향한 침략 정책은

    이러한 침략 정책은 자주 독립의 기초를 강화하려고 하던 한국인들과 직접적인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개혁 세력은 독립협회에 결집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열강으로부터 벗어나 자주 독립을 열망하는 한국인들의 투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59년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청나라의 명목상 예속국이던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패정치 척결, 내정개혁, 민중의 참정권과 민권운동을 위해 1896년 7월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민중계몽과 참정권, 천부인권을 소개하고 백성의 정치참여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독립협회는 회원 가입에 자격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다 많은 백성들과 다양한 계층의 참여를 위해 1897년 독립협회와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의 주최 하에 한성부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세기 말 한국에 들어온 열강은 한국의 광산 · 철도 · 전선 · 삼림 · 어장 등의 이권을 침탈하고 한국을 식민지 종속국으로 만들려고 획책하였다. 1896년 2월 11일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에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가지 폐해가 나타났다.


    정권을 장악한 친러파들은 갑오개혁 당시의 내각 제도를 의정부 제도로 복구시켜 국왕의 전제권 제한 조치를 풀어 전제군주제를 부활시켰으며, 러시아를 비롯한 구미 열강에게 광산 · 철도 · 삼림 · 어장 등의 각종 이권을 양여하였다. 특히 열강의 이권 침탈과 깊숙한 내정 간섭으로 한국의 자주 독립은 심각하게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러시아는 극동에서 남하 정책을 추진하여 부동항과 군사 기지를 설치하려 하였다. 그런데 러시아의 정책이 단순한 이권 침탈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식민지화를 노린 침략 간섭 정책이었으므로 일본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 때 영국과 미국은 이권 획득에 힘쓰면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을 은근히 후원하였다. 프랑스와 독일은 이권 획득에 열중하며 영국의 견제를 목적으로 러시아에 밀착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삼국간섭주1을 통해 일본의 침략을 일단 견제하는 데 성공했으나 새로이 강화된 러시아의 침략 시도를 막고 열강들의 이권 침탈을 긴급히 저지시켜야 할 처지에 당면하게 되었다.


    우선 고종이 하루 속히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하여 자위력을 갖추고 자주 독립권을 확고히 세우며,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국민은 원하고 있었다. 비로소 1897년 2월 20일 밤 1년만에 개혁파와 자주적 수구파의 연합 세력의 노력에 의해 고종은 경운궁(慶雲宮)으로 환궁하였다. 8월에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10월 고종을 대군주로부터 황제로 승격,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며 대외적으로 완전 자주 독립을 재선언하였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한국이 전통적으로 자주 독립국이며 임오군란 이후의 청국의 간섭, 청일전쟁 이후의 일본의 간섭, 아관파천 이후의 러시아의 간섭과 같은 것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로 러시아는 1897년 9월 주한러시아공사를 종래의 베베르(Veber, K. I.)로부터 적극적 침략 간섭 정책을 주장해 오던 스페이에르(Speyer, A.)로 교체하였다. 본격적인 식민지 속국화의 침략 간섭 정책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베베르에서 스페이에르로 주한러시아공사가 교체된 시기를 전후하여 당시 러시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책을 시행하려 하였다. 첫째, 군사 기지 설치의 제1차 작업으로 부산 절영도(絶影島)[^2]의 석탄고기지 조차(租借)를 요구하여 왔다. 그들은 부산 · 진해 · 마산포일대에 겨울에도 얼지 않는 군항을 건설할 준비를 시작한 것이었다.


    둘째, 대한제국의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해 황실 호위를 담당하던 시위대(侍衛隊)에 러시아 사관들을 파견하여 러시아 군사 편제에 따라 편성하고 훈련시켜 러시아의 장악 하에 두려고 하였다.


    러시아는 1897년 8월 3일부터 13명의 사관과 다수의 사병을 불러들였으며, 11월에는 레미노프(Reminoff)를 기기창(機器廠) 고문으로서 임명하였다. 또한 러시아는 서울에 1,000명의 러시아 육군을 상주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에 300명의 코작기병을 주둔시켜서 모두 1, 300명의 러시아군을 대한제국의 수도에 주둔시킬 계획을 추진하였다.


    셋째, 대한제국의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러시아 전 재무대신서리 알렉세이예프(Alexeiev, K.)를 한국 재정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1897년 12월에는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반관반민의 한러은행(The Russ · Korean Bank)을 창설하도록 하였다.


    제정러시아의 이러한 침략 정책은 자주 독립의 기초를 강화하려고 하던 한국인들과 직접적인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개혁 세력은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결집되어 가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창립되어 독립문 · 독립공원 · 독립관의 건립 운동과 토론회 등의 계몽 운동을 전개하면서 개혁파의 세력을 확대시켜 나가고, 우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러시아의 침략 정책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자, 러시아와 친러 수구파들은 『독립신문』을 폐간시키려 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