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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좀합시다
그만좀합시다23.07.25

폼페이는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게 되었나요?

폼페이에 살고있던 사람들이 외부에 알릴 사이도없이 순식간에 멸망하고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현재 폼페이에 대한 발굴이 전부 이루어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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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산 폭발로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79년 8월 24일 오후 1시,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하는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거대한 폭발하고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분출물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내렸습니다.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폼페이는 이 화산 폭발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소멸한 도시 중 하나입니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폼페이에 살고있던 사람들이 외부에 알릴 사이도없이 순식간에 멸망하고 사라진 이유는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 때문입니다. 베수비오 화산은 서기 79년 8월 24일 폭발하여 폼페이를 덮쳐버렸습니다. 화산 폭발로 인해 폼페이는 뜨거운 화산재와 가스, 돌풍에 의해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숨을 쉴 수 없게 되어 사망했습니다. 폼페이의 멸망은 당시 로마 제국에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현재 폼페이에 대한 발굴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폼페이는 매우 큰 도시였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이 발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폼페이의 발굴은 로마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폼페이의 멸망은 자연재해의 위험성을 일깨우는 사건입니다. 오늘날에도 화산, 지진, 홍수, 태풍 등과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재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하며, 재해 발생 시 신속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인해 단 18시간 만에 소멸되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도 3분의 2정도 밖에 발굴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많아,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베수비오 화산이 터져서 화산재가 온통 도시를 집어 삼켰지요! 이탈리아인이 사랑한 유명휴양도시이며 항구도시인 폼페이는 그렇게 순식간에 화산재밑으로 사라져버립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금은 내륙(內陸)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江)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의 관문에 해당하여 농업 ·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였으며, 제정(帝政)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피서 ·피한의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다. 폼페이의 기원은 매우 오래 되었으며, 처음에는 오스키인(人)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다. BC 470∼BC 424년경에는 에트루리아인(人)이 차지하였고, 그 뒤 BC 80년까지는 삼니트인들이 도시를 지배하였다.

    그동안 남부 이탈리아에 많은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한 그리스인들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특히 BC 3세기 중반부터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사실이 발굴 결과 밝혀지고 있다. 그후 동맹시전쟁(同盟市戰爭, BC 91∼BC 88) 때에는 동맹시 쪽에 가담하였으므로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의 공격에 굴복,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그 뒤부터 급격히 로마화(化)하였다.

    제정로마 초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폼페이는 고대도시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인구는 2만∼5만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인구의 계절적 변동폭이 크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에서는 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63년 2월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전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 재건되었으나,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m 두께의 화산력(火山礫)과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렸다.


    당시의 분화상황은 소(小)플리니우스가 실감있게 전해주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은 참화를 면했으나 2,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분화가 멎은 뒤 재보(財寶)를 발굴한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잊혀졌다. 16세기 말부터 소규모 발굴이 시작되고 1748년부터 본격 발굴에 착수하여 꾸준히 발굴이 계속되었으며, 옛 시가의 거의 절반 정도가 발굴되었다.

    벽화를 포함한 초기의 발굴품은 대부분 나폴리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가급적 현지에서 복원한다는 방침이다. 전성기에 갑자기 멸망하였으므로, 당시 로마 도시의 일상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었으며, 그것들은 상당히 쾌락적이고 현세 향락적인 도시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폼페이의 많은 벽화를 통하여 유품이 적은 헬레니즘 회화를 엿볼 수 있다.

    출처 :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000년 전,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인하여

    건물들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압사하거나 질직사하거나,

    도시는 화산재와 화산암 더미에 파묻힘으로 고대 도시 폼페이는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1700년대에 이 도시가 처음으로 발굴되면서

    전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1800년대에 더욱 정확하게 발굴되었습니다.

    아직도 발굴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