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교통도 발달이 잘안되고 통시시설도 미비한 상태인데요 전국에 주요 범죄를 알리는 현장수배범을 어떻게 알려섰을까요? 전국 현장수배는 가능했는지요?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교통과 통신 시설이 미비하여 전국적인 현장수배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신, 주요 범죄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지역의 관리들이 소식을 전달하고, 이를 통해 다른 지역에서도 정보를 공유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교통 및 통신 시설이 미비했기 때문에 전국 단위의 현장 수배가 불가능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전화나 인터넷 등의 통신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범죄 발생 시 해당 지역에서만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국 단위의 현장 수배는 불가능했으며, 대부분의 사건은 해당 지역의 관청에서 처리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용모 파기라는 몽타쥬를 여러 장 그려서 전국에 있는 포청을 통해서 한꺼 번에 파발마를 통해서 유통이 가능 햇을 것 입니다. 지금 으로 따지면 범인의 용모를 인쇄 화 해서 전국에 뿌린는 것과 같은 방법 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용모파기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잡기 위해 용모와 특징을 그린 것으로 한지에 먹으로 그리는데 의금부 나졸들이 붙이고 다녔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오느날의 몽타쥬에 해당하는 용모파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로 관아에 소속된 용모화공이 그렸습니다. 중요 범죄자는 이런 용모파기를 그려서 마을 입구나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놓아 신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