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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러스
사일러스23.01.20

적인걸은 중국역사에서 실존했던 인물인가요?

근래에 적인걸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대거 나왔는데,

물론 영화니까 각색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적인걸이라는 인물은 실존했습니까?

실제로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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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적인걸은 당나라의 인물로 자는 회영, 적지손의 아들이며 태원 사람입니다.

    그는 누사덕의 추천으로 발탁되고 명경과를 거쳐 병주도독부법조를 지내가 대리승으로 옮겼으며 676년 권선재와 범회의 등이 소릉의 측백나무를 찍어버리는 죄를 저질러 당고종이 그들을 죽이려고하자 간언하여 영남에 유배를 보내는 것에 그치게 합니다.

    679년 시어사를 지내면서 위홍기가 숙우 ,고산, 상양 등의 궁을 만들자 사치를 부린다는 죄를 들어 탄핵했고, 왕본립이 총애를 믿고 권세를 휘두르자 간사하다고 상주했고, 당고종이 그를 용서했지만 끝까지 간언하여 죄를 얻게 만듭니다.

    686년 영주자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공덕비를 세우고, 때문에 중앙으로 천거되어 동관시랑이 되며 688년 강남도순무대사를 겸임하며 오, 초 지역의 사당 중 1700여곳을 불태우고 하우, 오태백, 계찰, 오자서 의 사당만 남겼습니다.

    문촤좌승을 지내다 에주자사로 옮기는데 이때 이정의 모반이 진압되어 모반에 연루된 자가 6700가문, 처형당할 인원이 5천명에 이르렀는데 이때 적인걸은 저들은 잘못 인도된것 뿐이니 용서하기를 요청하여 측천무후는 그들을 풍주로 유배하고, 영주의 부로들이 유배된 자에게 적사군께서 당신들을 살렸다고 합니다.

    장굉보가 예주에서 뇌물을 요청하지만 거절했다가 미움을 사 복주자사로 좌천, 691년 낙주사마로 있다가 지관시랑에 임명, 692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내준신으로부터 모반을 꾸몄다 무고당해 팽택현령으로 당긍

    696년 위주자사가 되고 전임자사는 거란족에게 맞서 백성들의 입성을 위해 수성기구를 정비하나 적인걸은 부임 후 백성을 밭으로 돌려보내 농사짓게 하였습니다.

    그는 난태시랑, 동봉각 난태평장사를 거펴 은청광록대부에 이르며 조정에서는 백성들을 징발해 안서사진을 지키게해 원성이 많았는데 적인걸은 안동도호부를 폐지하고 고씨를 고구려의 군주로 복립하여 강남의 양초수송을 중지하고 하북의 백성들을 위로할 것은 건의하였습니다.

    698년 측천무우에게 간언하여 무승사, 무삼사를 후사로세울 뜻을 꺾고 폐위됐던 당중종을 황태자로 삼게합니다.

    689년 6월13일 겹납언이 되고 9월21일에 하북도행군부원수가 되어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묵철가한을 추격하지만 잡지 못하고 하북도 무마대사로 임명되어 하북을 무마시켰는데 당시 하북 백성들은 돌궐에 겁박당했고, 돌궐이 퇴각하자 이에 연루될까 두려워 피신하는데 적인걸이 무측천으로 하여금 하북 여러 주의 백성들을 사면하고 귀향시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습니다.

    700년 여름 4월29일에 측천무후가 더위를 피해 삼양궁으로 행차했을 때 이국의 승려가 사리를 매장하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자 적인걸이 부터는 이적의 신으로 저들은 가까운 사람을 미옥한다 간언하고 측천무후가 커다란 불상을 만드려고 하자 간언하여 중지시킵니다.

    적인걸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지만 측천무후는 매번 허락하지 않았고 같은 해 7월 26일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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