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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1.01

시인 이육사가 번호라고 하는데요. 이육사에 대한 인물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예전에 티비에서 이육사에 대해 잠깐 나온거 같은데요. 언뜻 듣기에는 이름이 264라는 번호라고 한거 같은데요. 일제강점기에 이육사 시인은 어떤 분이었는지 자세히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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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1개의 답변이 있어요!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11.01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호 육사, 본명 원록 또는 원삼, 개명은 활 , 경북 안동 출생으로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 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1926년 베이징으로 가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하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뤘으며 그때 수인번호 264를 따 호를 육사라 지었습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 을 신조선 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와 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과 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 1937년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를 비롯해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했습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습니다.

    이육사의 시는 독립에 대한 의지와 항일 투쟁에 대한 내용을 담고있으나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보다 언어적 정제를 통해 화려한 상징과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정신적 의지를 드러내며, 베이징 유학 시절 받은 중국 문학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는 유교적인 태도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부분이 기존의 저항시들이 가지고 있던 시적인 면모와 다르며 한편으로 정신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