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두산정계비의 설치 배경과정이 궁금하군요.
백두산 정계(定界)가 문제가 된 것은 청나라의 강희제 때이다. 강희제는 백두산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여겨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1677년 음력 12월에는 백두산을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에 봉하여 제를 지내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강희제는 전국적인 지리지 편찬 사업을 추진하면서 백두산 일대에 대한 자체적인 지리 조사와 더불어 조선에 대해 사계(査界)를 비공식적으로 계속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조선 조정은 영고탑 회귀설 등 대청(對淸) 위기의식의 불안감으로 이를 거부하다가 1712년에 강희제가 황명으로 공식적으로 요청하자 받아들이게 됩니다.
1712년(숙종 38년)에 청나라는 목극등을 사신으로 파견하고, 조선 측에서는 함경부사 이선부와 참판 박권이 접반사로 혜산진에서 맞이하였으며, 목극등은 이의복·조태상 등과 함께 음력 5월 15일 백두산에 올랐다가 천지(天池)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찾아내고, 산정(山頂)의 남동쪽으로 4km 지점인 해발 2,150m 지점의 분수령에 비를 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