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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지식23.06.18

조선시대 성리학에 대해서 궁굼합니다.

조선은 고려와 다른 정치, 경제 체제를 지녔고 독특한 사상을 지닌 국가였다고 들었습니다. 지배층들은 불교보다는 성리학을 주도 이념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성리학이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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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학을 발전사적으로 볼 때 선진(先秦)의 본원(本源) 유학, 한당(漢唐)의 훈고(訓詁) 유학, 송명(宋明)의 성리학, 청(淸)의 고증학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성리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성명·의리의 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다. 중국 송(宋)대에 들어와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을 ‘성리(性理)·의리(義理)·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하였는데 이를 성리학이라 부른다. 성리학은 보통 주자학(朱子學)·정주학(程朱學)·이학(理學)·도학(道學)·신유학(新儒學) 등의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송의 주희(朱熹)는 주렴계(周濂溪),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를 도통(道統)으로 삼고서 도교와 불교가 실질이 없는 공허한 교설(虛無寂滅之敎)을 주장한다고 생각하여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한편 같은 유학임에도 불구하고 주희(朱熹)의 성리학이 이(理)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학이라 부르고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학문은 상대적으로 마음(心)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심학(心學)이라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정주계의 이학이 크게 발달하고 육왕계의 심학(心學)은 미미하였다. 같은 시기의 일본에서는 심학이 주류였던 것과 대조적이다.


    불교는 당(唐)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지만 송대에는 성리학이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면서 중심 사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폐쇄적 귀족 사회였던 당은 안록산(安祿山)의 난과 황소(黃巢)의 난을 계기로 멸망하고 오대십국(五代十國, 907-960)의 혼란기를 겪으며 송나라가 등장하였다.


    오대(五代)의 마지막 왕조였던 후주(後周, 951-960)는 재정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교에 대해 대규모의 박해를 가하였다.


    송대로 접어든 이후 관료학자(士大夫)로서의 유학자들은 불교의 출세간성·반사회성·비윤리성 등을 공허하다(虛學)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성리학을 참된 학문(實學)이라고 정당화하였다. 당시 유학자들이 보기에 도교의 은둔 경향과 불교의 세속을 떠난 출가는 가정과 사회의 윤리 기강을 무너뜨리는 요인이었다.


    성리학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 공동체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공동체의 윤리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의 중심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대학≫에 나오는 팔조목(八條目)인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개인의 수양과 국가의 통치를 위한 행위 규범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주로 사회적 인간 관계와 개인의 수양이라는 두 측면에서 그 사상을 심화시켰다. ≪주례 周禮≫를 중시함으로써 사회 윤리인 예(禮)를 강조함과 동시에 우주 본체, 인간 심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탐구를 심화시킴으로써 도교나 불교를 형이상학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는 유교의 텍스트들 중에서 ≪대학≫·≪논어≫·≪맹자≫·≪중용≫의 사서(四書)를 경전화시킴으로써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논어≫는 공자의 교설을 제자들이 모은 것이고, ≪맹자≫는 맹자의 교설을 제자들이 모은 것이다. ≪대학≫·≪중용≫은 원래 ≪예기≫의 한 편이었는데 ≪대학≫은 증자(曾子)와 그 문인들이 지었고 ≪중용≫은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생각하여 각각 한 책으로 독립시켰다.


    사서의 정립을 통하여 공자(孔子)·증자·자사(子思)·맹자(孟子)라는 유학 도통의 계보를 역사적으로 예시하고자 하였다.


    또한 주희는 사서에 주(註)를 달았는데 이는 나중에 성리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이와 같이 성리학의 중심 텍스트를 선정하고 거기에 새로운 해석학적 틀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유학으로 거듭났다.


    성리학의 특징은 공자·맹자의 선진 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일분수(理一分殊)·천도유행(天道流行)·생생지리(生生之理)로써 보편타당한 법칙의 편재를 주장하였다.


    인간은 우주의 보편타당한 법칙(天理)을 부여받았다고 보아 인간성(性)을 본질적으로 신뢰하였다. 자신의 지나치거나 부족한(過不及) 기질(氣質)을 교정하면 선(善)한 본성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성리학에서는 보편타당한 법칙을 궁구하고(窮理) 자신의 본성을 다 발휘(盡性)할 것을 주장하였다.


    보편타당한 법칙을 온전히 익히기(體認·體得) 위한 방법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론을 제시한다. 즉 사사물물(事事物物)에 깃들어 있는 이치(理)를 궁구하여 인간의 앎을 확장할 것을 제시하였다.


    한편 공자가 말했던 자기실현의 학문(爲己之學)을 닦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하였다. 자기자신의 마음을 항상 반성적으로 살피고(存心), 본성을 기르며(養性),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를 신중히 하는 것(愼獨·戒懼) 등이 그것이다.


    성리학은 마음(心)의 극단으로 치닫는 불교와 기(氣)의 극단으로 치닫는 도교를 비판하면서 마음·기·이의 통합적 구도를 제시한다. 이와 기는 성격상 다른 것(不相雜, 決是二物)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不相離, 理氣相須)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마음·성(性)·정(情)의 역시 통합적 구조로 해석하였다.


    마음은 성과 정 전체를 아우르는 것(心統性情)으로 보았다. 인(仁)·의(義)·예(禮)·지(智)로 구성되어 있는 마음의 본체(未發心體)가 성이고 성이 밖으로 표현되면 정이 된다고 하였다. 성과 정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체용일원(體用一源)의 관계에 있으므로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형이상자(形而上者)인 도(道)와 형이하자(形而下者)인 기(器) 역시 단절되지 않는다(無間斷)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체용일원(體用一源)의 구도를 가졌던 성리학은 일상적인 것(日用之間)에서부터 학문의 근본을 다져야 한다(下學而上達)고 주장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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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리학은 중국에서 전래된 유교 학문 중 하나입니다.

    조선의 건국 세력은 신흥무인세력인 이성계와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이었습니다.

    그 신진사대부들이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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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자의 유학이 13세기 주자에 의해 해석된 것이 주자학이며 신유학이라고 불렸다. 이 주자학이 고려 말 안향에 의해 들어와 발전한 것을 성리학이라 부른다.


    성리학은 신유학으로써 조선조의 대강을 이루었고 선비들의 교재로써 또 과거시험에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기고봉과 퇴계의 13년에 걸친 토론은 매우 유명하며 높은조선의 성리학 수준을 보여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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