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춤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나요?
봉산탈춤, 북청 사자놀이 등 각종 탈춤은 지금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각종 행사에서 볼 수 있는데요. 이런 탈춤은 언제부터 시작했고, 어떤 이유로 만들어진건가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탈춤의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탈춤의 발전 양상은 조동일 교수의 논의를 비롯하여 학계에서도 아래와 같이 크게 세 가지의 흐름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흐름은 농촌탈춤으로 농촌 자체에서 오랫동안 이어온 행사이다. 농촌탈춤은 향촌 사회의 동제나 농악대굿 등에서 마을신을 즐겁게 하여 역병을 몰아내고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행해졌다. 대표적인 농촌탈춤은 고려시대부터 행해진 안동시 하회 별신굿 탈놀이다. 지배 계층에 대해 노골적이고 통렬한 풍자를 담고 있는 이 탈놀이는 향촌 양반의 묵인과 지원까지 받아가며 행해진 것이 주목할 만한데 백성들이 가진 양반에 대한 반감을 일정부분 해소시켜줌으로써 궁극적으로 향촌 사회의 안정을 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1930년대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가 1970년대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두 번째 흐름은 떠돌이탈춤(본산대놀이)로 농촌탈춤에서 파생되었다. 조선 후기 경제의 발전으로 도시가 형성되면서 농촌에서 살 수 없어 떠돌이놀이패로 나선 가난한 유랑민 무리들과 궁중 산대희나 나례희와 같은 국중 대회에서 공연했던 놀이패들이 탈춤을 흥밋거리로 만들어 서울 근교의 여러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상업적으로 행한 탈춤이다.
세 번째 흐름은 도시탈춤(별산대놀이)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조선 후기 경제의 발전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떠돌이놀이패들이 도시를 전전하며 탈놀이를 행했는데 도시의 유지와 상인들은 이들을 초청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떠돌이놀이패들이 약속을 어기는 일이 잦아지자 도시의 유지와 상인들은 자체적으로 놀이패들을 만들고 이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하게 되었는데 본산대놀이와 다르다고 하여 별산대놀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농촌과 달리 양반에게 직접적으로 예속되지 않아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발달하였기 때문에 양반을 풍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대사의 분량과 내용이 풍부해졌다. 대표적인 도시 탈춤은 봉산탈춤, 양주 별산대놀이, 송파 산대놀이, 동래야류, 통영오광대 등이 있다.
이러한 탈춤들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산업화 등을 거치면서 상당부분 사라졌지만, 그래도 일부 사람들이 꾸준히 유지하면서 버티고 있으며, 상당수 대한민국의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보호받고 있으면서 전승되고 있다.출처: 나무위키 탈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농촌탈춤은 농촌 자체에서 오랫동안 이어온 행사로 향촌 사회의 동제나 농악대굿 등에서 마을신을 즐겁게하여 역병을 몰아내고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행해졌습니다.
떠돌이탈춤은 농촌탈춤에서 파생되어 조선 후기 경제의 발전으로 도시가 형성되면서 농촌에서 살 수 없어 떠돌이놀이패로 나선 가난한 유랑민 무리들과 궁중 산대희나 나례희와 같은 국중 대회에서 공연했던 놀이패들이 탈춤을 흥밋거리로 만들어 서울 근교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상업적으로 행했습니다.
도시탈춤은 떠돌이패들이 약속을 어기는 일이 잦자 도시의 유지와 상인들은 자체적으로 놀이패를 만들고 이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하게 되며 본산대놀이와 다르다고 하여 별산대놀이로 칭하게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초기에는 농경사회에서 가을걷이에 감사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거나
굿을 할 때 가면을 쓰고 춤을 추었습니다.
후기와 민간에 보급되면서는 지배층이나 특권층을 풍자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삼국시대에는 궁중에서 열리는 연회나 불교 행사 때 탈춤 공연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산대도감이라는 관청을 두어 국가 행사가 있을 때 가면극을 상연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민간에게 보급되면서 탈춤은 전성기를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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