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조가 요동 망명을 고집하자 신료들의 건의에 따라 분조(分朝)를 결정하였다. 세자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수개월 동안 평안도 · 강원도 · 함경도 등지를 오가며 8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독려하는 등, 국왕의 몽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규합하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명나라 황제의 칙서에 따라 무군사(撫軍司)를 이끌며 야전을 누볐다. 이에 민심은 선조를 떠나 광해군에게 크게 쏠렸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선조는 광해군을 심하게 견제하였다. 명나라 장수를 접견하는 자리에 임해군을 동석시키는가 하면, 젊은 계비에게서 끝내 영창대군을 낳는 등 광해군의 세자 지위를 심각하게 흔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명나라 내부 사정으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청(奏請)은 무려 다섯 차례나 거절당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은 어렵게 즉위하였다. 하지만 명나라는 국왕 책봉을 또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장자 임해군의 병세가 과연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차관을 파견하는 등 새 국왕 광해군에게 씻기 힘든 수모를 주었다. 결국 책봉을 받기는 하였으나, 장자도 적자도 아니라는 출생 신분은 광해군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