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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세자가 8년 간의 인질생활 끝에 1645년 2월 18일에 입경하였으나 소현세자를 환영보다는 냉대였으며, 세자에 대한 군신의 진하(進賀)도 못하게 막아버렸습니다. 결국 소현세자는 귀국 두달만인 1645년 죽습니다. 소현세자의 독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사망한 이후 몸에 검은 반점이 나타났고, 시신이 빠르게 부패했다는 점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인조가 소용 조씨가 이형익을 시켜 세자를 독살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인조가 소현 세자를 독살 의혹에 대해서는 첫째, 본국에서는 무력한 존재이나, 심양관에서는 조청(朝淸) 양국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소현세자는 청에 머무르면서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격이 되었으니 아무리 아들이라도 인조의 입장에서 불쾌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소현세자가 청에 머무르는 동안 아담샬과 교류하면서 서양 문물에 관심이 높았습니다. 귀국 후에도 서양 서적과 문물을 선보여 인조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그외에도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에 머무르는 동안 지나친 국고 낭비, 사무역 자행을 달갑지 않게 보았으며, 인조의 총비 조소용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세자를 모함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반청 감정과 어긋나 행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