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 시절때 핵개발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박정희 정부 시절, 그러니까 3공화국 혹은 4공화국 시기에 미국 몰래 핵무장을 검토하고 실제로 연구까지 했다고 하는데,
그 스토리의 전말은 어떻게 됩니까?
단순히 호사가들이 만들어 놓은 음모론인가요? 아니면 실제로 검토된 정책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박정희 정부에서의 핵개발 시도는 사실로 보입니다.
아래의 기사에 자세한 내용이 설명되어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482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1대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은 박정희가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원자폭탄을 연구해보자, 핵무기를 개발하다 미국이 방해해 못 만들게 되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라도 갖춰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회고하며 핵무장은 한국 경제가 중화학공업시대로 전환한 1973년 부터 본격화 되었으며 오원철 수석 또한 1972년 자신과 김정렴 비서실장을 집무실에 불러 일본 정도의 핵기술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합니다.
1973년 박정희는 중화학공업화정책선언을 하며 경남 창원에 종합기계공단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천명, 국가기록원 오원철 수석이 1972년 건의한 안을 대통령이 재가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점, 핵개발 관련 기업인 현대양행이 창원에 소재한 기업이었다는 점, 이 선언 직후 해당 지역에 원자로 제조시설이 들어선 점, 1981년까지 무려 8년여에 이르는 장기적인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던 점은 중화학공업과 핵무장이 동시에 진행중이었으며 기술의 내재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10.26 사건 발생 직전, 박정희는 우라늄 농축 분말인 옐로 케이크를 선물 받았으나 10.26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급작스럽게 중단되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북한은 1955년 '핵물리연구소'를 창설하고 1956년 소련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하였다. 1962년에는 소련으로부터 연구용 원자로인 IRT-2000를 반입하였다. 이는 소련이 IRT-2000을 처음 개발한지 4년 만이다. 이승만 정권에서는 1955년 미국과의 원자력협정을 체결하였고, 다음해부터 2~3년에 걸쳐 120여 명에 달하는 '원자력 유학생'을 미국에 소재한 '아르곤 국립 연구소(Argonne National Laboratory)에 파견하였다. 1957년, 아르곤 연구소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윤세윤 서울대 교수가 1956년 설치되었던 문교부 기술교육부 원자력과의 과장에 취임한다. 같은 해에 국회에서는 '원자력법'이 제출되어 58년 통과되었으며, 1959년에는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승만 정권 퇴진 후인 1962년, 한국의 최초 원자로인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 2(Triga Mk. 2)'가 들어섰다.
이후 박정희 정권 치하의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었다. 한국 정부는 곧바로 정상회담을 요청해 동년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정희와 닉슨이 회담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닉슨은 주한미군의 변화에 대해 사전통보하겠다고 하였다. 1970년 3월,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박정희에게 주한미군 2만명을 이듬해까지 철수하고 1975년에 완전 철수할 것을 통보했다. 베트남전의 대규모 국군 파병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국에서 미군 철수가 가시화되는 단계에 이르자 박정희 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1970년, 무기개발위원회(WEC)와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설립되었고, 무기개발위원회에서 핵무기 개발이 위원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한편 ADD에서는 무기 국산화 사업인 번개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까지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을 목표로 기본병기 국산화를 완료하고 80년대 초까지 항공기, 유도탄을 국산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 오원철 전 수석이 수시로 방문해 관리했다고 한다.
11대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은 박정희가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원자폭탄을 연구해 보자. 핵무기를 개발하다 미국이 방해해 못 만들게 되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라도 갖춰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회고하였다. 핵무장은 한국 경제가 중화학공업 시대로 전환한 1973년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오원철 수석 또한 1972년 자신과 김정렴 비서실장을 집무실에 불러 "일본 정도의 핵기술을 확보하라"고 지시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대사는 미국이 73년 한국의 핵무장 동향을 처음 파악했다고 했다.
핵무장을 위해 한국 정부는 당시 미국과 핵기술의 분배를 놓고 이견이 있던 프랑스에 접근했다. 1972년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방불(訪佛)하고 73년 김종필 총리가 방불했으며, 뒤이은 1975년 프랑스의 국영원자력기업 SGN(Saint Gobin Techniques Nouvelles)과의 재처리 기술 공급 계약이 체결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은 성공을 눈앞에 뒀다. 이 계약이 실행되었다면 연간 20kg의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했다고 한다. 동시에 박정희의 특명으로 외국에 나가있는 우수한 한국인 과학자들이 귀국하였고, 오원철 수석은 캐나다를 방문해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캔두(CANDU) 원자로의 도입을 진행했다. 한국보다 먼저 캔두 원자로를 도입한 인도와 파키스탄이 결국 핵무장한 것으로 볼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적지 않았다. 또한 한국은 이 시기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의 도입과 국산화를 진행하였다. 즉, 프랑스에서 재처리 시설, 캐나다에서 중수로, 미국에서 발사체 기술을 확보해 핵개발과 핵 체계를 단번에 구축하려는 의도로 풀이되었다.
1973년, 박정희는 중화학공업화정책선언을 하면서 경남 창원에 종합기계공단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국가기록원 오원철 수석이 1972년 건의한 안을 대통령이 재가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점, 핵개발 관련 기업인 현대양행이 창원에 소재한 기업이었다는 점, 이 선언 직후 해당 지역에 원자로 제조시설이 들어선 점, 1981년까지 무려 8년여에 이르는 장기적인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던 점은 중화학공업과 핵무장이 동시 진행중이었으며, 기술의 내재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1974년,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압박이 거세져 한국 원자력 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 대전기계창 등 핵무장 관련 시설 뿐 아니라 청와대, 대한민국 국방부, 과학기술처 등 국가부처의 부서장에게까지 주한미국대사관 직원들과 CIA 요원들이 따라붙어 명시적인 중단 압력을 가했다. 오원철 수석에 따르면 여러 시설에 나누어 진행한 것은 미국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7개 프로젝트로 나누어 오직 컨트롤타워인 청와대에서만 정보판단이 가능하도록 했다고 한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은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였으며, 문제의 캔두 원자로인 월성 1호기가 무사히 착공되었다. 이듬해 1976년, 박정희는 "정 끝까지 가겠다면 결정적인 제재를 가할 수 밖에 없다"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다. 도널드 그래그 전 대사는 "2011년 북한에 대해 미국이 핵개발 억제를 위해 애쓰는 것과 똑같았다."고 미국의 중단압박의 방식을 묘사하였다. 또한 김종필 전 총리는 미국의 정보력이 뛰어났다기보다는 "한국 내부 스파이들이 CIA에 고자질"했다고 평가했다. 그와 함께 프랑스와의 재처리협정은 파기되었으며, 1977년 무렵 핵개발은 중단되었다. link 도널드 그래그 전 미 대사는 그 이후 한국의 핵무장 시도가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하여간 미국의 압박이 어느정도였냐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파기하겠다는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보면 되었다.
하지만 오원철 제2경제수석의 진술에 따르면 프랑스와의 계약 파기와 관련없이 재처리기술도 확보되어있는 상황이었으며, 핵심 기자재들을 밀반입하는데에 성공했다. link 1978년에는 미국의 청와대 도청사건이 외교적 파문을 낳았다. 1979년 2월, 오 수석을 포함한 핵개발을 전담하는 책임자들이 청와대에서 비밀 회동을 가졌고 박정희 대통령은 핵개발이 88% 진척되었다고 보고받았으며 모종의 결단을 문서화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핵무기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상징적 차원에서도 핵무기 관련 문서에 일절 서명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오원철 수석의 증언이다. 자세한 내용은 노코멘트하고 있으나, "핵을 무기화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회의였다는 설명으로 놓고 볼때 이미 1970년대 초에 설정한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해놓자는 목표는 사실상 달성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0.26 사건 발생 직전, 박정희는 우라늄 농축 분말인 옐로 케이크(yellow cake)를 선물받았다. 그러나 직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급작스럽게 중단되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1대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은 박정희가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원자폭탄을 연구해 보자. 핵무기를 개발하다 미국이 방해해 못 만들게 되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라도 갖춰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핵무장은 한국 경제가 중화학공업 시대로 전환한 1973년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합니다. 오원철 수석 또한 1972년 자신과 김정렴 비서실장을 집무실에 불러 "일본 정도의 핵기술을 확보하라"고 지시하였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대사는 미국이 73년 한국의 핵무장 동향을 처음 파악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용인하지 않은 미국의 간섭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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