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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6.01

사명대사는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승려가 되었던 건가요?

사명대사는 유교 교육을 받으며 자란 사람인데 어쩌다 불교에 귀의하게 된건가요?

당시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는 멀리했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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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7세를 전후하여 『사략』을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습니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3년 뒤 승과(僧科)에 합격하자, 박순(朴淳),임제(林悌) 등의 유생들과 사귀었으며, 재상인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 『장자』, 『문자』, 『열자』와 시를 배웠습니다.


    그 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이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도를 닦았습니다.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아, 1586년(선조 19)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연류되었다는 모함을 받았으나, 강릉의 유생들이 무죄를 항소하여 석방되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유점사(楡岾寺)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습니다.


    이 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 해 3월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자, 선조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습니다.


    그 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대표로 나아가 적진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졌습니다. 제1차 회담(1594년 4월 13∼16일)·제2차 회담(1594년 7월 12∼16일)·제3차 회담(1594년 12월 23일)·제4차 회담(1597년 3월 18일)에서, 강화5조약으로 제시된 ‘천자와 결혼할 것, 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전과 같이 교린 할 것, 왕자 1명을 일본에 영주하게 할 것, 조선의 대신·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물리쳤습니다.


    제2차 회담 후, 선조에게 회담의 전말과 적의 동정 및 대처 방안을 내용으로 하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국민을 총동원하여 빈틈없는 작전을 세울 것, 적과 교린(交隣)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동시에 민력(民力)을 무장할 것, 군수 무기를 준비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1595년에 올린 을미상소의 주요 내용은, 탐관오리들을 소탕할 것, 국세 회복을 위해 방어책을 세울 것, 인물 본위로 등용할 것, 군정(軍政)과 중농정책을 확립할 것, 산성을 수축하고 군량·마초·방어무기를 준비할 것, 승려도 국가 수비의 일익을 담당하게 할 것 등입니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 또는 美崇山城)·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입니다.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1594년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였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비장하였습니다. 선조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1604년 휴정의 부음을 받고 가던 중, 선조의 명으로 일본에 가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습니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습니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 등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무리 조선이 유교사회였다 할지라도 한반도에 1000년 가량 이어져 오던 불교도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사명대사는 1558년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의 가르침을 받아 승려가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사의 출가 동기는 어러가지 말들이 많습니다. ‘석장비명’에서는 그가 13세 때 황악산 황유촌 문하에서 <맹자>를 배우다가 ‘세속의 학문은 저속하다’고 탄식하면서 불가로 귀의하였다고 한다고 전해 집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지은 시나 상소문에서 ‘문호의 영락과 부모의 서세 때문’에 승려가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가 신묵화상에게로 정식 출가한 것은 부모가 돌아가신 후 16세 이후의 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사진자료 : 밀양시 무안면 사명대사 생가 기념관벽화]

    그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그는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 · 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 (龍起山城) · 악견산성(岳堅山城) · 이숭산성(李崇山城) · 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명대사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중기의 고승. 풍천 임씨.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 경상남도 밀양출신.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 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그는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 · 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 (龍起山城) · 악견산성(岳堅山城) · 이숭산성(李崇山城) · 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奮忠서難錄)>1권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사명대사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종 12년 13세 나이로 황여헌을 사사하다가 1558년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에게 선을 받아 신묵의 가르침을 받아 승려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