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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04.13

조선 단종의 복원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단종은 세조 수양대군에 의해서 살해당한 억울한 왕인데요 언제 어떻게 다시 복원됐는지 아시는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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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단종이 당한 모든 수모에 대해 사후에도 논란이 불거지고,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의 계기도 이와 관련이 있으며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이 폐위된 후 사림에서 복권 논의가 나옵니다.

    사림에서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던 서인과 노론에서 적극적으로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여 중종과 효종 때 단종의 복권에 대한 사대부들의 지지 여론 형성에 나서며 단종에 대한 복위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숙종 7년 노산대군으로 승격된 후 숙종 24년 단종으로 복위, 추존되었으며 동시에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에게 정순이라는 시호도 함께 올렸습니다.

    복귀시킬때의 명분은 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것은 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때문이었기에,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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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실 단종의 복원은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단종의 복원은 곧 세조의 정당성에 흠집을 내는 일이였기 떄문 이였습니다. 결정적 전기가 마련된 것은 1674년에 숙종이 등극한 이후였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당쟁이 유별나게 극심했는데요. 사림파의 두 분파인 남인당과 서인당이 치열하게 대결했고 그 향배에 따라 사약 사발이 이쪽 당에서 저쪽 당으로 옮겨지곤 했습니다. 이런 정국 속에서도 사림파 내 다수파인 서인당 중심으로 단종 복권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됐지요. 그리고 숙종은 이전 임금들과 달리 이 문제를 색다른 각도에서 바라봤다. 단종을 복권시킴으로써 생기는 손실(수양대군 이미지의 흠집)보다 이익(왕권 강화에 도움)이 더 크다고 그는 판단했다고 합니다. 단종과 그에게 충성을 바친 사육신의 이미지를 활용하면, 극심한 당쟁의 소용돌이에 놓인 숙종 자신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높일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였지요. 숙종 즉위 7년 뒤인 1681년에는 단종이 노산군에서 노산대군으로 격상됐다고 합니다. 17년 뒤인 1698년에는 노산대군에서 주상으로 한층 더 격상됐고 이에 따라 단종이라는 묘호도 부여받게 됐습니다. 이렇게, 대중의 동정심과 더불어 사림파의 집권 및 숙종의 결단이 어우러지면서, 단종은 죽은 지 232년 만에 왕의 지위를 회복하게 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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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대 임금 숙종이 선대왕 단종 추존을 승인하게 되면서 노산군일기가 단종실록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제목만 단종실록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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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단종의 복위는 숙종 7년(1681년) 노산대군으로 승격된 후 숙종 24년(1698년) 단종으로 복위/추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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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의 장남이었던 문종이 왕으로 등극한후 2년3개월만에 죽고맙니다.

    문종이 죽고나서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나이가 불과12살에 불과했습니다.

    보통 왕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면 대비나 대왕대비가 성인이 될때까지 수렴첨정을 하거나 했는데

    단종이 즉위할 무렵에는 대비,대왕대비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왕위가 매우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당시에는 문종의 동생들인 수양대군,안평대군,금성대군같은 단종의 숙부들의 세력과,

    김종서,황보인,남지 등 문종의 고명을 받은 대신들의 세력등이 존재하여 대립할뿐이었습니다.

    그중 안평대군의 경우는 수양대군못지않은 세력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왕위에 관심이 없었고

    예술에 능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그는 6진을 개척하는데 김종서와 공을 세워 김종서와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합니다.

    금성대군도 수양대군에 비하면 약할지 모르겠으나 왕재라는 평판을 듣을정도로 올곧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고명대신들은 (김종서,황보인,남지) 왕권에 위협이 될수있는 왕실세력들을 견제하기 시작하는데요.

    황표정사라고해서 의정부의 정승들이 미리 심사하여,황색점을 찍은 인사안을 단종에게 올리면 단종은

    형식상 확인후 결재하는식의 정치를 말하는데요.

    이때 고명대신들은 이런 방식으로 수양대군의 사람들을 하나씩 조정에서 밀어냈던겁니다.

    그리고 그런 왕실 불만은 김종서와 가까운 안평대군이 무마하는 식으로해서 조금씩 왕실 세력들을

    견제해나간것이지요.

    이에 위협을 느낀 수양대군은 일부러 몸을 낮춰서 권력에 관심이 없는척 일부러 명나라 사은사로 자청해서

    떠나는등 일종의 쇼를 합니다. 그러면서 뒤로는 계유정난의 준비를 시작한것이죠.

    수양대군은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 김종서집을 찾아가 그를 참살하고, 왕명이라고 속이고 조정대신들을

    입궐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이었고, 미리 수양대군의 가신이었던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서 철저히

    고명대신 세력들을 참살하고 맙니다.

    그렇게 고명대신들세력들을 축출하고, 동생 안평대군도 고명대신들과 세력과 결탁했다하여 그를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고 끝내 사사시킵니다. 권력에는 피붙이도 소용이 없지요.

    그렇게 반대파들을 모두 제거한 상태,즉, 밥상이 잘차려졌으니 먹는일만 남았지요.

    수양대군은 역모를 사전에 알고 선처리 후보고 하는 형식으로 계유정난을 정당화 시키구요.

    수양대군은 영의정 및 이조,병조겸임판서 등 조정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단종의 서무결제궈까지 대리하는등 왕은 사실상 수양대군이나 다름없게되었지요.

    전해지는 말에는 김종서는 당시에는 죽지않고 깨어나서 수양대군에 맞서기 위해서 함경도에 있던

    자신의 기반세력들을 규합하려 했으나 황표정사를 통해서 권력독점을 하게되면서

    수양대군세력이 아닌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다른 관리들에게도 불만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 김종서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가는등 충격으로 죽었다고도 합니다.

    김종서가 죽었다는 소식에 김종서를 따르는 기반세력들이 복수하려했으나 한명회등 수양대군의 세력들이

    신속히 병권을 틀어쥐어 김종서의 복수도 못했다고도 합니다.

    암튼, 이때까지 집현전 학사출신의 사육신들은 수양대군의 야심을 알면서도 고명대신들의 권력독점에

    대한 불만때문에 아마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묵인한듯 싶습니다.

    수양대군이 사실상 정권을 차지하고, 수양대군의 가신들은 단종을 위협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은 그후 조용히 살았으면 문제가 없었을겁니다.

    왕으로 즉위한 세조역시 아마도 단종을 죽일생각까지는 없었던듯 싶으나, 그의 가신들은 그렇지 못했죠.

    그러던 도중에 세조의 왕위찬탈에 불만을 품은 사육신들은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다시 복위시킬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박팽년, 성삼문,하위지,유응부,이개,유성원을 말하는데 후에 김문기가 추가되기는 합니다.

    (김문기와 유응부를 두고 말이 많습니다..)

    암튼 그들은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환영회때 세조와 가신들을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할것을 계획합니다.

    그런데 이날 왕의 곁에서 지키는 운검에 유응부와 성승 등으로 정해졌으나 후에 운검배치를 배제하는것으로

    변경되면서 기존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이에 유응부는 계획을 강행할것을 주장합니다.박팽년과 성삼문은 세자가 본궁에 있는등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서 계획을 실행하기 어렵다며 계획을 다른날로 택해 실행하자고 주장합니다.

    유응부는 이런일은 서둘러 단행하지않으면 비밀이 누설되어서 실패할수있다며, 세자가 비록 본궁에 있으나

    세조와 그 가신들이 모여있으니 그들을 모두 참살하고,상왕(단종)을 모시고 왕위에 올려 왕권으로 명령한다면 성공할거라고 계속 강행할것을 주장합니다.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며 유응부의 주장을 만류하는 바람에 유응부역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동료들의

    권유를 따르기로 합니다.

    그런데 모의한 사람들중 김질 이라는 사람이 혹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하여 후환이 두려워서, 우찬성이었던 장인 정찬손을 찾아가 단종복위 거사에 대해서 모두 고발하고 맙니다.

    이에 정찬손은 세조에게 보고하였고, 김질의 밀고로 단종복위거사는 사전에 탄로되어 연루된 모든이가

    체포되어 처형됩니다.

    정인지,정창손,신숙주 등 세조의 측근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매일같이 세조에게 상왕도 이에 연루되어

    있으니 유배를 보내야한다는 상소를 올렸고, 세조는 몇번 거절하다가 결국 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등하여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전에 세조의 가신들이 단종에게 왕위를 선위하라는 요구했다는 말을 들은 금성대군이 직접 수양대군을

    찾아가서 정인지등 세조의 가신들을 당장 극형에 쳐하라고하는등 옳은 소리를 하다가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후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당해 유배를 가게되자, 이에 크게 분노합니다.

    세조에 대한 않좋은 말등을 하다가 이것을 단종복위를 꾸민다는 것으로 오해되어 세조의 귀에 들어갔고

    결국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합니다.

    또한 이 모든 일의 빌미가 된다고 하여, 단종마저도 사사하는데요.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는데 활시위를 이용해서 단종을 목졸라 살해했다고 하구요.

    단종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합니다.

    단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라 15살때 숙부에게 밀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고,

    16살때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생활하다가 그다음해 17살 어린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되었습니다.

    이후에 단종의 주검은 동강에 버려졌다고하는데요.

    엄홍도라는 사람이 그 시신을 수습하여 암장을 했다고합니다.

    어쨌든 죄인을 묻어준것도 죄이므로 엄홍도도 숨어살았다고 하구요.

    후에도 세조의 후손들이 왕이 되었으니 왕의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중종때인가 겨우 봉분을 갖출수있게 해주었다고 하구요.

    그러나가 거의 사후 200년 정도 흐른뒤에 숙종대에 이르러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복위되어 드디어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게되었습니다.

    단종의 능을 장릉이라 하였고, 장릉밑에 충신당을 지어서 김종서부터해서 단종의 신하들은 물론

    궁녀들? 엄홍도등이 배식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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