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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얀굴뚝새243
뽀얀굴뚝새24323.08.13

병자호란이 일어난 역사적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조선 인조 때 조선과 청나라간 일어난 굴욕적인 전쟁이라고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장악한

인조가 왜 전쟁을 일으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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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 정부의 외교적 실책과, 약체인 군사력, 무엇보다 명(明)이 기울고 청(淸)이 일어서던 대외(對外)정세에 대한 정보 수집력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는, 명청 교체기, 즉 명(明)나라가 쇠퇴하고 만주족(후금)이 강해지기 시작했었죠. 하지만, 조선은 일찍부터 명나라에 조공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또 명나라는 이전에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서 조선을 구원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이었던 광해군은 국제정세를 읽고,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중립외교를 펼칩니다. 그것이 불만인 조선내 신하들은 쿠데타를 감행하고, 광해군을 내쫓은 후 새로이 '인조'를 임금자리에 앉힙니다. 이것을 인조반정이라고 합니다. 새로 들어선 인조정부는 광해군과는 정반대되는 정책, 즉 명나라를 가까이하고 청나라(당시 후금)를 배척하게 됩니다. 그래서 후금의 태종(홍타이치)은 조선을 침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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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으면서 두나라 관계가 정리되는 듯 했으나 1636년 후금의 사신이었던 용골대와 마부태가 후금의 태종 칭호를 조선에 알리며 군신관계를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은 사신을 만나지도 않고 사신을 핍박하였습니다. 후금은 황제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인질로 보내어 사과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조선은 주화파와 척화파로 나뉘어 분열하였고 청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들어온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조선은 임경엽장군이 백마산성에서 저항했으나 후금은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처들어왔습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고자 했으나 여의치않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그러나 강화도에 있던 왕실가족이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조는 삼전도에 설치된 수향단에서 태종에게 수치스러운 삼배구 고두례를 올리고 삼전도비를 세우게 됩니다. 청태종은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을 인질로 삼고 주전파인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 삼학사를 사로잡아 조선에서 철수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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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의 발생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후금과 형제지국의 관계이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였고, 조선을 아우의 나라에서 신하의 나라로 만들려는 의도로 굴욕적인 요구를 해 오면서였습니다.
    그리고 신하들 사이에서도 오랑캐를 섬기는 것에 대한 반발이 심했고,

    무리한 군신관계 요구로 척화론이 대두가 되었고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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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27년 후금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 됩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 이후 중강과 회령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했고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들의 괴로움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해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의 로 개약하자고 요정, 황금, 백금 1만냥, 전마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와 정병 3만까지 요구합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 1636년 2월 용골대, 마부태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의 문상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를 극간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진의 접견을 거절, 국서를 받지 않고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합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도망치던 중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됩니다.

    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 비로소 명확하게 알수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됩니다.

    같은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있는 조선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해 11월 심양에 간 조선 사신들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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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조선이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약속을 했음에도 명나라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자 '조선을 확실하게 눌러놓고 명나라와 싸워야겠다' 라고 생각한 청 태종(숭덕제)이 군대를 이끌고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쳐들어 온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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