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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태양새285
탁월한태양새28523.04.28

조선시대 정묘호란 병자호란에 관해서

조선시대에 인조가 왕인 시절 그 당시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때 정묘호란은 형제관계 병자호란은 군신관계라던데 사실 표현상의 차이일뿐이지 결국 조선이 심하게 패배한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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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묘호란때는 완전히 밀리지는 않았습니다.

    일부 전투에서는 조선군이 후금군의 보급로를 끊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의병들이 봉기하여 후금군을 기습했고 당시 후금군도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조선에서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었습니다.

    이에 형제관계로 대략 마무리하고 후금이 조선조정과 협정을 맺고 돌아간 전쟁입니다. 하지만 병자호란은 틀렸습니다.

    압도적으로 홍타이지가 직접 끌고 온 군사들로 남한산성의 조선군을 압박했고 완벽한 승리로 조선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항복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정묘호란 때는 패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굴복은 하지 않았지만 병자호란때는

    부모의 나라로 섬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군신의 맹약이 성립 된 것이지요. 조선으로서는 치욕의 맹약이었습니다. 여진족은

    본디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에게 이제 상황이 뒤바뀐 것이니까요.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자료에 따르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다음의 내용이 존재합니다.

    즉, 그 시기에 따라 후금(청)의 국력자체가 완전히 달라져서 더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인조 때의 서인 정권은 광해군 때와는 달리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펴서 후금의 경계심을 사게 되었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의 군대가 이를 틈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쳐들어왔다(정묘호란, 1627). 그러나 당시에는 후금의 군사력이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할 정도는 아니어서 일단 화의를 맺고 되돌아갔다.

    그 후, 국력이 더욱 커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압박하여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 왔다. 조선 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청의 태종은 10여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다시 쳐들어왔다(병자호란, 1636). 한양이 청군에 의해 점령되자,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