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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13

조선시대에 병자호란은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이 궁금합니다.

1636년 인조 14년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한 병자호란으로 우리나라는 쑥대밭이 되었는데 이런 병자호란은 왜 일어났는지 그 역사적 배경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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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은 일찌기 정묘호란으로 형제관계를 맺은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는데 조선이 이를 거절하고 특히 인조가 청나라와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각처에 발송한 대비책을 세우라는 편지가 청나라 사신들에게 발각, 청태종이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조선부터 굴복시켜서 후방의 안정을 세우려는 생각으로 침략하여 발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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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윤 축복
    승윤 축복23.04.13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누르하치가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를 정복하려

    하였으나 명의 명장 원숭환 장군에게 산해관 전투

    에서 대패하게 됩니다. 명나라는 당시 후금과의

    전투를 막기위해 네덜란드로 부터 홍이포를 도입하는데 이는 서양식 신식 대포였습니다. 원숭환은

    이 신식 홍이포를 이용하여 기마전술을 이용하는

    누르하치군을 막아냈고 누르하치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이어서 후금의 2대 한(후금의 왕) 자리에 오른 홍타이지는 대단히

    철두철미한 인물이었습니다. 명에게 당한 패배로

    후금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오랜 전쟁으로 식량난

    까지 겪었습니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홍타이지는

    명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기 전에 조선을 먼저 정벌

    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이라는 보급창고를 확보한 후에 명을 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홍타이지는 즉위

    후 국가 이름을 대청제국으로 바꾸고 조선과의 전쟁을 선택하게 되고 300명의 정예병을 보내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막고 당시 청의 거의 모든

    전력인 6만 정도를 동원하여 조선의 한양을 바로

    공격하여 남한산성에 인조를 고립시키고 홍이포로

    위협하여 결국 항복을 받아 냅니다.

    즉 홍타이지는 명국 배후의 위협을 없애고 전쟁을

    수행하기에 앞서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과의

    의리를 주장하고 있는 조선을 먼저 공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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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대륙 진출에 있어 조선은 후방을 노리는 비수와 같은 존재

    그러나 조선은 군사력이 미미해 실질적인 위협은 되지 못하나

    명나라 군대와 동맹을 맺어 명군을 조선땅에 주둔 시킬 경우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비록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패한 국력탓에 광해군때 부터

    인조에 이르기 까지 중립을 고수했지만 후금으로선 분명히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던 겁니다.라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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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 뒤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나라로 조약을 맺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후금은 중국 대륙을 놓고 명과 벌이던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자 태도가 달라졌다.

    이전에도 후금은 조선 조정에 막대한 물자를 바치라고 강요하거나 병선이나 병력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에 더해 두 나라의 관계를 군신(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후금의 요구에 조선 조정은 크게 분노했다. 차라리 후금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게 낫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1635년에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친 후금은 조선이 보인 태도를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그에 대한 대가로 왕자를 볼모로 보낼 것, 전쟁을 주장했던 신하들 중 주동자를 체포하여 보낼 것을 요구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청의 임금 태종은 1636년 12월에 13만여 명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쳤지만 청의 선봉군은 불과 10일 만에 한양 근처까지 도달했다.

    당황한 조선 조정은 왕자들을 강화도로 피난시켰지만, 정작 임금인 인조는 길이 끊겨 어쩔 수 없이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던 남한산성에는 겨우 50일분의 식량밖에 없었다. 청의 군대는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한 채 시간을 보냈다.

    조선 조정은 명에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청과 싸움에서 계속 밀리고 있던 명은 구원병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출동했던 명의 수군도 풍랑을 만나 되돌아갔다.

    조선 각지에서 관군과 의병들이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그마저도 모두 청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인조와 조선 조정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결국 청에 화해를 청했다.

    조선은 인조가 직접 청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절차를 거쳐 청과 강화를 맺었다. 그리고 청이 요구하는 강화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다.

    소현 세자와 둘째 왕자인 봉림 대군을 청에 볼모(인질)로 보냈고, 청에 조공을 바쳤으며, 예를 갖추기 위한 사신을 파견하고, 청이 전쟁을 할 때 군사를 보내기로 약속한 것이다.

    출 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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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금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내세우자 1627년 후금은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조선과 후금은 강화를 맺고 양국관계는 일단락 되지만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친명정책을 취하는 조선을 견제하게 되었고 배후의 안정을 위해 조선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후금은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의 대등한 관계에서 군신지의로 고칠것과 황금, 백금 1만냥, 전마 3000필 등 세폐와 정병 3만을 요구했습니다.

    1636년 2월 용골대, 마부태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를 강요하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을 내려 후금과 결전할 의사를 굳히고 1636년 4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청이라 고치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 대신, 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합니다 .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보다 척화론자가 강해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자 홍타이지는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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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조선이 명나라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자,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금이 군신관계를 요구하면서 보다 확실하게 조선이라는 변수를 제거하고 명나라를 정벌해 중원을 통일하기 위해 '조선을 먼저 눌러놓자' 라고 해서 일으킨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 병자호란[1636년] 이후 정확히 8년 뒤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16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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