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서경 천도 운동에 관해 궁금증
고려시대 중기쯤에 서경파와 개경파가 나뉘어서
묘청이 서경 천도운동을 하게 되었던데
왜 서경으로 옮기려고 했는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126년 일어난 이자겸의 난으로 인종은 기존 개경의 문벌 세력에 환멸을 느끼고 고려의 대부분 보수 문벌들은 이자겸을 지지했습니다.
개경의 문벌이 왕이 아닌 외척인 이자겸에서 쏠렸다는 것은 개경에서의 왕권은 이자겸이 제거되더라고 약할수밖에 없음을 의미하여 1127년 척준경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정지상을 중심으로 새롭게 기존의 개경 보수 문벌 세력과 결을 달리하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이들은 기존 개경 보수 문벌들과 달리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 자주적인 모습을 표방하며 등장합니다.
이들 자주적 문벌세력이 대부분 서경을 중심으로하는 세력이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개경파, 서경파의 대립구도가 형성되게 됩니다.
정지상 등 서경세력은 정권의 변화를 이루기 위해 본격적으로 서경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이용한 사람이 서경의 승려 묘청입니다.
묘청은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서경 천도를 주장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인종때 이자겸은 자신의 딸들을 왕비로 세우고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이자겸의 난을 일으켜 국가 기강을 어지럽히게 되고 대외적으로는 여진이 세운 금나라의 기세가 대단하였으며 이를 대비하기에 고려의 국력은 약했습니다. 이에 개경을 중심으로 한 사대주의 유교주의에 반대해서 서경의 스님인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개경은 쇠락했으니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묘청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자겸의 난으로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자겸이 몰락한 이후에 정치는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경주 김씨와 같은 문벌 귀족 세력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 출신의 신진 관료들을 중심으로 특정 가문의 권력 독점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과 정지상·백수한 같은 신진 관료들은 인종에게 ‘고려를 황제국이라 칭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하며, 금을 정벌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리고 이의 실현을 위하여 서경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인종은 이들의 의견에 따라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까지 지으며 수도를 옮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개경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기존의 귀족 세력들이 끈질기게 서경 천도를 반대해서, 인종은 결국 서경으로의 천도를 포기했습니다.
서경 천도를 주장했던 세력은 닭 쫓던 개 지붕쳐다 보는 꼴이 되었습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서경파는 묘청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어(1135). 묘청은 나라 이름을 ‘대위국’, 연호를 ‘천개’라 하며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난은 1년여를 끌었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정부군에 의하여 결국 진압되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장콩 선생님과 함께 묻고 답하는 한국사카페 1, 2011. 8. 5., 장용준(장콩), 서은경)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인종 때 묘청과 정지상을 중심으로 하는 서경 세력이 고려의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고 했던 운동. 이자겸의 난과 함께 고려 문벌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유명하다.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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