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7

일제강점기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남자현'이라는 인물은 어떤 독립운동을 했었나요?

일제강점기에 유관순 열사만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남자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 분은 어떠한 독립운동들을 했었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군사기관과 농어촌을 순회하며 독립정신을 고취시킨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양(英陽). 경상북도 영양 출신. 남정한(南廷漢)의 딸이다. 19세 때 김영주(金永周)와 결혼하였다. 6년 후인 1895년 남편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3대독자인 유복자를 기르면서 시부모를 모셨다.

    생애 및 활동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각 단체와 군사기관,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동만주 12곳에 교회와 예배당을 세워 전도하였으며, 10여 곳에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을 계몽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간의 단합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1924년 채찬(蔡燦)·이청산(李靑山) 등과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마침 그때 길림(吉林)주민회장 이규동(李圭東),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1928년 길림에서 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 등 47명이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지성으로 간호하며 석방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1년 김동삼이 하얼빈[哈爾濱]에서 붙잡히자 그를 탈출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32년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죽이기로 하고,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노파 차림으로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6개월 동안 갖은 혹형을 받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자현 [南慈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17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암살을 계획했으며 혈서 조선독립원을 작성하여 조국의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일본장교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녀는 1872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어요. 어려서부터 높은 벼슬을 지낸 아버지로부터 공부를 한 덕에 일찍 한글과 한문을 깨치고, 유학 관련 책을 두루 읽었지요.

    19세 되던 해 그녀는 안동 사람 김영주와 결혼을 했어요. 하지만 편안한 결혼생활을 하기에는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어요. 1895년에는 일본이 왕비(훗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일까지 벌어졌거든요. 나라를 구하고자 곳곳에서 의병들이 들고일어나 일본에 맞섰지요. 그녀의 남편도 의병에 참여했어요. 남자현이 25살 되던 해,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어요. 의병 활동을 하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이었지요. 그녀는 배 속에 든 아이를 어루만지면서 일본에 대한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하지만 남자현은 넋 놓고 슬퍼할 수만은 없었어요. 보살펴야 할 3대 독자인 아들과 늙으신 시부모님이 계셨거든요. 열심히 누에를 기르고 명주를 짜 내다 팔며 집안을 꾸려나가야 했지요. 어찌나 효심이 깊었던지 그녀는 효부상을 받기도 했어요.

    남편이 죽은 지도 어느덧 23년이 지났어요. 이제 그녀의 아들도 어엿한 청년이 되었지요. 그즈음 남자현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일이 벌어졌어요. 바로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이지요. 3·1 운동을 접한 그녀는 일본에 맞서 남편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설 때가 되었음을 알았어요. 얼마 후 남자현은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어요

    무엇보다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따르던 사람들은 젊은 청년 독립군들이었지요. 그녀는 독립군들이 다치거나 아팠을 때 정성껏 치료하고 간호해 주었어요. 청산리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 10여 명이 적에게 쫓겨 숨어 다니다 남자현의 집에 숨어들었어요. 그들 중 일부는 심한 부상을 입고 있었고, 겨울 추위에 대부분 동상까지 걸렸었지요.

    남자현은 큰 독에 물을 반쯤 채운 뒤 들어앉아 있게 해 동상을 풀어 주고, 다친 곳을 치료해 주었어요. 따뜻한 음식도 대접해 주었어요. 마치 친어머니처럼 말이에요. 이후 그녀는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게 되었지요.

    남자현은 여자교육회를 만들고, 교회도 세웠어요. 여성들을 교육하고, 믿음을 길러 주며 정신을 깨우쳐 주었어요. 또 각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 운동이 지지부진하자 독립운동 단체들을 찾아다니며 통합을 이끌어 냈어요.

    그녀는 중국 땅까지 와서 독립운동을 하며 생각의 차이로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이러한 분열을 막기 위해 두 차례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 자신의 독립 의지를 전했어요.

    그녀는 당시 ‘세 손가락의 여장군’으로 불렸답니다.

    1933년 2월 말, 하얼빈 교외에 한 거지 차림의 여인이 바삐 걸어가고 있었어요. 바로 남자현이었지요. 그녀는 일본의 만주국 건국 기념일에 주만주국 일본 대사를 암살할 계획이었어요. 하지만 계획이 들통 나 그녀를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어요. 일제 경찰에 체포된 남자현은 분했어요. 일제의 심장에 총을 겨누어 보지도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으니 말이에요. 체포 당시 그녀는 죽은 남편의 피 묻은 옷을 속에 껴입은 채였다고 해요.

    체포된 남자현은 일본 영사관 유치장에 갇혔어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감옥에 갇힌 남자현은 모진 고문을 당했어요. 결국 스스로 죽음으로 일제에 저항하기로 마음먹은 남자현은 1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풀려나게 되었어요.

    하지만 몸이 너무 쇠약해진 그녀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62세에 숨을 거두었어요. 그녀는 마지막 순간 아들에게 중국 돈 200여 원을 주면서 우리나라가 독립되면 독립 축하금으로 전달해 달라고 했지요.

    그녀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정신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