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었다면 적어도 광해군 대 중립외교를 할때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생각했어야 하는데 명분만 내세우다가 두 차례에 걸친 호란을 겪어야 했던 임금이므로 어떻게 보면 무능했다고도 볼 수 있으며, 자기 아들(소현세자)을 죽였다는 의혹까지 휩싸여 있기 때문에 조선 왕들 중에서는 하위에 포함되는 임금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조선의 16대 임금으로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 정책을 썼습니다.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해 수어청 총융청 등을 신설하였으며 북면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해 여러 곳에 진을 신설하였습니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을 감당하지 못하여전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의 죽음과 고통이 가중되었습니다.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해 남한산성에서 40여일간 버티다가 결국 삼전도의 굴욕(삼배고구도)을 당하였습니다. 소현세자부부와의 갈등으로 소현세자(독살설이 있음) 세자빈을 내치고 사사시켰으며 손자들 또한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