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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굳센때까치2923.11.28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당연합국으로 백제, 고구려 등을 멸망시켰는데 두 국가 사이는 어떤 문제로 멀어지게 된건가요? 또, 결국 싸우게 된 두 나라 중 신라가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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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할 수 있던 원동력은 669년부터 준비된 문무대왕의 당나라와 결전을 불사르면 안되겠다는 각오의 치밀한 준비와 계산과 적의 병법을 우리 방식으로 만드는 노력(신라의 천보노, 육화진법, 장창부대)입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의 근거지인 한반도 동남쪽은 중국 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당의 공격이 쉽지 않았습니다. 반면, 당은 신라를 정복하기 위해 많은 군사력과 물자가 필요했으므로 지속적인 전쟁 수행이 어려웠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나라는 과도한 욕심으로 평양이북의 땅을 요구합니다. 이에 신라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벌어지게 됩니다. 670년 3월 신라의 오골성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어 672년 8월 석문전투에서 신라가 크게 패하였습니다. 나당전쟁의 분수령은 675년 9월에 발생한 매소성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전세는 신라로 기울었습니다. 이후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전쟁은 마무리되었습니다. 나당전쟁의 승리로 신라는 진정한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당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백제 · 고구려 멸망 이후 나당간의 영토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라는 백제 · 고구려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승전의 대가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후 당은 백제 옛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고구려 옛 땅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고자 하였다. 영토 문제 외에 좀 더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나당전쟁을 주도한 신라 수뇌부의 입장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나당연합이 결성되어 백제와 고구려를 원정하는 과정상에서 당에 의한 신라 군령권(軍令權) 침해가 위험수위에 다다랐으며, 그에 따른 신라 왕과 신라 군부의 반발이 거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평양을 견제할 수 있고 한강하류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전략요충지인 비열홀(比列忽: 함경남도 안변, 현재 북한의 강원도 안변군)을 둘러싼 나당간의 갈등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비열홀은 고구려 멸망 이전 신라가 장악하였으나,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안동도호부로 귀속시키고자 하였다. 나당전쟁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나당간의 영토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신라 군부의 불만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당전쟁의 결정적 전투는 매소성 전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전역에서 당은 패배 내지는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의 대규모 원정군이 수년간 투입되어 영토나 인력 · 재물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0만 이상 투입된 당의 대규모 원정은 하북도(河北道) · 하남도(河南道) · 강남도(江南道)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루어졌다. 나당전쟁의 종결과 함께 이들은 귀국길에 올랐고, 이들의 귀국은 당 정국에 상당한 파장을 미쳤다.


    당은 676년 11월과 12월에 나당전쟁의 후유증을 무마하기 위해 개원(改元)과 대사면(大赦免)를 실시하고, 반군부세력인 이경현(李敬玄)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삼았다. 나아가 대규모 순무사(巡撫使)를 나당전쟁과 관련된 지역으로 파견하여 민심 수습에 주력하였다. 중국 동부 지역이 나당전쟁에서 병력과 물자를 충원하던 지역임을 감안해 보면, 당은 나당전쟁의 결과 상당한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당전쟁은 당시 최강대국 당과 동북의 변방국인 신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당이나 신라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하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볼 때 당은 공세를 지속하였으나 신라가 당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당의 보급문제를 야기시켰던 것은 분명하다. 당은 원정군의 보급문제 · 국내의 여론악화와 더불어, 토번의 서북변경 위협이라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