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12.22

월트 디즈니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지금은 영화와 OTT서비스로 더 알려져 있지만, 제가 어릴땐 만화, 애니메이션 회사였던 월트 디즈니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디즈니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알려주세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월트 디즈니는 1923년 월트와 로이 디즈니가 설립한 만화 스튜디오 기업으로 출발하였습니다. 1929년 월트디즈니 프로덕션을 설립하였으며, 1986년부터 스튜디오 이름이 월트 디즈니로 변경되었고 이후 1940년 주식을 상장하였으며 이후 전 세계적인 미디어 콘텐츠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월트 디즈니는 세계 최초로 유성, 컬러,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인물입니다. 1923년 로이와 월트 디즈니 형제가 디즈니 브러더스 카툰 스튜디오 설립하여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1926년 월트 디즈니로 스튜디오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고 드디어 1928년 미키 마우스 캐릭터가 등장하고 1930년에는 컬럼비아픽처스에 통해 영화를 배급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50년 코카콜라와 함께 손을 잡고 티비 체널을 만듭니다.


  •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월트 디즈니가 바로 만든 사람 이름입니다

    월트 디즈니의 회사=월트 디즈니 컴퍼니=디즈니 인거죠

    1901년 12월 5일 미국 시카고 출생의 월트 디즈니는 상상력이 뛰어나고 그림을 좋아했지만

    가난한 농민 가문이라서 정식 교육을 못받아 화가로 성공하진 못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전전하던 디즈니는 세계 1차대전 후

    뉴욕에서 자작한 빨간모자 애니가 성공한 것을 계기로,

    비교적 새로운 시장인 애니메이션에선 자신도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 어브 아이웍스라는 애니메이터와 함깨

    동화를 소재로한 단편애니를 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세운 회사인 래프 오 그램은

    뉴욕의 배급업체와 사기에 가까운 계약을 맺어 계약금 고작 100달러를 받고 회사가 도산했고,

    그후로 디즈니는 뉴스, 영화의 카메라맨으로 직업을 옮겼죠.

    카메라맨으로 경력을 쌓은 디즈니는 할리우드에서 영화감독 데뷔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그냥 또 애니나 만들기로 해서 형과 함께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를 세웠고

    움직임 그 자체보다는 감정선이나 디테일을 강조하는 특유의 애니메이션 기법이 크게 히트를 처서 성공합니다

    그후 유니버설 픽쳐스가 거지같은 계약으로 자기 캐릭터를 훔쳐가는 짓을 하자 복수심에 불타는 디즈니가

    혼신의 힘으로 만든 미키마우스가 미친듯이 대박을 터지며 회사가 점점 커지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회사가 망할 정도로 돈을 빌려서 만든

    "세계최초 풀컬러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가 진짜 말도안되게 성공한 후로

    직원만 1천명이 넘는 거대 스튜디오로 성장했습니다.

    그 후로는 돈을 끌어쓰는 버릇을 못버려서 적자경영으로 망할 뻔 했지만

    구조조정으로 근근히 버티면서 세계2차대전도 프로파간다 애니로 버티면서

    1950년 부터 신데렐라 같은 히트작을 다시 만들기 시작해 회사는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다만 디즈니 본인은 디즈니랜드를 세우느라 바뻐서 이 시기에는 애니제작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 디즈니랜드는 그냥 신기한 체험 모음집 수준이던 기존의 놀이공원을 하나의 테마를 갖춘 테마파크로

    발전시켰다고 평가를 받습니다.

    그 밖에도 서로 경쟁관계던 TV와 극장가를 연결해 영화 홍보용 TV시리즈 라는 새 시장을 개척하거나

    하나의 단일기업이 애니메이션,실사,다큐,테마파크,서적,굿즈 등등 다양한 장르를 총괄하는

    원소스 멀티유즈 개념을 확립하는등 여러가지 창의적인 시도를 많이 했었죠.

    그후로도 디즈니는 메리 포핀스 같은 실사영화에도 참여햇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가 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정글북을 제작하던 중 페암으로 쓰러졌고, 1966년 12월 1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창업자의 사망이후로 침체되던 회사 디즈니는 1980년대 이후 외부의 경영인을 초청해 내부구조를 쇄신해서

    영화 산업과 저작권으로 꿀을 빠는 현재의 거대기업 디즈니로 변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월트 디즈니는 미국 시카고 출신의

    월트디즈니가 형 로이와 함께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를 세웠고,

    실사-애니 합성영화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를 제작해 처음으로 성공하였고 이것이

    시초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래프 오 그램 (Laugh-O-Gram)

    월트는 집의 차고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거기서 다니던 회사의 카메라를 빌려다 영화적인 기교를 익혔다. 물론 그런 기교는 촬영방식을 확인하는 식의 거의 원초적인 작업이었고 무언가를 알아볼만한 애니메이션 교습서도 드물었다. 당시 애니메이션에 관심 있던 사람들의 필독서였던 E.G 러츠의 애니메이션 교습서만이 월트의 유일한 교과서였고 그것을 읽으며 월트는 셀 애니메이션의 기본기를 익혔다.

    회사에서의 낮일이 끝나고 나면 월트는 어브 아이웍스 등의 동료들과 함께 캔자스 시티 미술학원에 다니며 드로잉 수업을 들었다. 기본기가 닦이기 시작하면서 그는 이제 영화광고업자로 전환한 회사의 사장 코거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요청해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매체에 관심이 많았던 코거조차도 셀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필름을 쓰는 일에는 반대했고 월트는 결국 자력으로 첫걸음을 내딛을 수 밖에 없었다. '래프 오 그램 (Laugh-O-Gram)'이라고 이름지은 1분짜리 애니메이션 필름 릴을 회사 동료였던 하먼 형제와 만들어서 뉴먼 극장의 주인 프랭크 뉴먼을 찾아갔다. '래프 오 그램'은 그시절의 소단위 규모의 사회문제들을 풍자한 짧은 만화로 신문에 연재되는 풍자만화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었다. 월트가 찾아간 뉴먼은 예전에 월트가 일했던 미술가게의 페스먼이 소개해준 자였는데 1분의 짧은 시사를 마친 뒤 지체 없이 그 필름을 사고는 월트와 시리즈 계약도 맺었다.

    훗날 월트는 자신의 작품명을 따 래프 오 그램 필름사를 설립하고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그 회사의 사장이 된다.

    마셀린에서의 생활

    월트는 일생을 통틀어 어릴 때 살던 마을 마셀린을 잊지 못했다. 디즈니 영화가 늘 동물과 숲, 농경과 같은 끊임없는 목가적 꿈을 펼쳐오는 것도 마셀린이 월트에게 남긴 기억들이 새롭게 조직되는 과정에서 출현했다고 훗날의 분석가들은 말한다. 월트는 여기서 기차에 대한 동경과 작은 동물들과 함께 놀던 추억을 가지게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공동체 삶의 긍정적 희망을 발견하기도 했다.

    최초의 디즈니 스튜디오

    재정적인 문제로 래프 오 그램의 운영이 쉽지 않았던 월트는 새로운 시작점을 헐리우드로 결정지었지만 당대 애니메이션의 중심지는 당연 뉴욕이었다. 월트가 처음 헐리우드에 도착해서 찾아다닌 일도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실사영화의 감독직이었다. 이전에 형과 함께 개고생을 하며 만든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필름을 가지고 계약을 해볼 심산으로 여러 스튜디오 문을 두드렸지만 길은 열리지 않았고 결국 실사영화의 감독이 되는 것도, 앨리스 코미디를 파는 것도 몇 개월만에 모두 포기했다.

    위기 속에서도 기회는 찾아왔는데 헐리우드 역사상 최초의 여성 배급자인 마거릿 윈클러가 월트 디즈니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워너 브라더스의 비서인 동시에 자신만의 캐리어 확장을 꿈꾸던 그녀는 애니메이션 배급에서 이미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월트의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보자마자 시리즈의 성공 가능성을 점치고는 시리즈 배급계약을 제의했다. 일이 워너브라더스에 있던 윈클러의 상사에게도 알려지면서 그렇게 월트 디즈니의 워너브라더스에서의 첫 번째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계약을 끝난 뒤에도 월트를 괴롭혀왔던 돈은 여전히 커다란 벽이었다. 그런 월트를 도와준 사람은 로이 디즈니다. 로이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제작에 뜻이 있지는 않았지만 월트의 열정에 감복하고 그를 동경의 눈길로 보면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는 하루의 반을 병으로 인한 피곤함으로 누워보내면서도 사무실을 구하고 새로운 아파트를 임대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초창기의 일이지만 월트와 영화를 같이 제작하기 시작했다. 셀에 구멍을 뚫고 카메라를 다루는 일도 맡으면서 스튜디오의 재정까지 책임졌고 그런 역할은 수십년이 지나서도 계속되었다. 형제는 마침내 1923년 10월에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의 첫 간판을 달았다.

    오스왈드 래빗

    월트가 제작한 영화의 배급을 맡던 찰스 민츠와의 긴장이 가시기도 전에 월트가 제작한 영화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의 주인공 버지니아 데이비스와 스튜디오 사이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스튜디오에 애니메이터들이 대거 고용되면서 앨리스 코미디는 달라지고 있었고 돈과 배급과 배우의 문제가 계속 얽히면서 스튜디오의 분위기도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찰스 민츠는 월트에게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를 그만 제작하자고 제의한다. 단시간에 너무 많은 영화가 나온 앨리스 코미디는 이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비슷한 내용으로 장장 쉰 여섯편이 나온 상황이었다. 월트 역시 새로운 시리즈가 필요함에 동감했다. 그런 상황의 요구에 응답해 개발된 것이 바로 오스왈드 래빗 캐릭터였다. 당시 애니메이션 업계는 팰릭스 더 캣을 비롯한 고양이 캐릭터가 득세 중이었는데 스튜디오는 고양이가 진부해진 틈을 타 슬쩍 토끼 캐릭터를 꺼내놓았다.

    그 동안의 애니메이션의 코미디는 무분별한 슬랩스틱과 패러디로 비롯된 것이었고 월트는 여기서 캐릭터를 좀더 입체적으로 구성해보기로 결정한다. 비록 단편이지만 캐릭터에게 동기를 주고 그 동기로부터 불어나오는 의지를 통해 작품의 코미디를 새롭게 규정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바로 이 개성을 가진 캐릭터들에게서 최초의 퍼스낼리티 애니메이션들이 등장했고 오스왈드가 그 첫 번째 기수가 되었다.

    미키 마우스

    오스왈드 래빗으로 배급자 찰스 민츠와 자신의 애니메이터들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한 월트가 뉴욕에서 돌아오는 길에 화를 억누르는 심정으로 짧막한 시나리오 한 편을 썼다.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의 스토리에서 따온 것으로 제목은 'Plane Crazy(미친 비행기)'였고 주인공은 쥐로 결정했다. 이 수컷 쥐는 오스왈드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스튜디오에서 유일하게 월트의 편에 섰던 어브는 오스왈드의 귀를 줄이고 코를 통통하게 그린 캐릭터로, 아내 릴리언 디즈니의 의견으로 미키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고 이 캐릭터가 현재까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를 대표하는 미키 마우스가 되었다. 이후 미키의 디자인은 또 손을 보면서 고쳐 나갔다. 미키 마우스의 원형 디자인은 귀 부분에서 도드라지고 있는데 초창기 애니메이션에서도 귀 모양은 항상 둥글게 나타난다. 이런 디자인은 시청자들에게 미키 마우스가 쉽게 인식되게 해주며 귀 모양은 미키 마우스의 비공식적인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미키마우스 로고 모양은 디즈니社에서 미키 마우스를 표현할 때 종종 사용되고 있다

    증기선 윌리

    월트는 시사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깔아 상영했는데 그때의 관객들의 환호를 상기시키며 작품에 사운드를 도입해보기로 했다. 이 아이디어는 그때 제작중이던 미키 마우스의 두 번째 작품이 아닌 세 번째 작품 '증기선 윌리'에서 처음 실현시키기로 했다. 이 작품은 무성영화의 기수 비스티 키튼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패러디한 공식적인 미키마우스의 데뷔작으로 인식되었다. 또 최초의 유성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증기선 윌리의 시사회는 성공이었지만 총 네편의 미키마우스 시리즈 계약은 쉽지 않았다. 그 때 증기선 윌리를 본 적 있는 브로드웨이에 있는 콜로니 극장 주인이었던 해리 라이헨바흐란 남자가 월트에게 다가왔고 그 작품에게 매료된 그는 당시 애니메이션 가격으로는 유례없이 비싼 천불에 2주간의 상영권을 월트에게서 구입했다. 월트는 매일마다 극장에 와서 모든 상영을 지켜보며 극장 관객들의 반응을 체크했다. 관객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고 이 작품은 미키 마우징이라고 불리는 언더스코어링 기법-액션과 사운드를 유기적으로 결합한-을 사용한 첫 번째 애니메이션이었다. 뉴욕타임즈에 월트의 작품에 대한 긍정적 기사가 실리고 그토록 작품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배급사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한다.

    컬러 애니메이션

    월트는 이전까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실감나는 만화를 만들고 싶었다. 컬러 애니메이션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컬러 프린트의 상태들이 좋지 않아 눈을 심하게 자극하거나 물빠진 색만 보이는게 대다수인지라 실용화시키지는 못했지만 월트는 이미 유니버설에서 일하던 월터 랜츠가 최초로 사운드와 컬러를 입힌 애니메이션 '재즈가수'-일부분이 컬러다-을 보며 연구에 몰두했다.

    그렇게 나온 애니메이션 '꽃과 나무'는 앞서 말한 삼색 인쇄법을 활용한 최초의 컬러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이미 월터 랜츠가 컬러 애니메이션을 시도했지만 그 작품보다 이 영화가 더 뛰어난 평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색의 선명함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놀라운 사실성 때문이었다. 이전과는 색이 전혀 다른 애니메이션이 처음 등장한 것이었다.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비평적으로도 큰 성과를 남겼다. 그 해 처음생긴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첫 수상작이 되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월트는 바로 그 부문에서 이해부터 8년 연속으로 상을 받게 된다.

    중흥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전성기는 1930~1940년대로 불리며, 1970년대 이후로는 버블경제를 뒤에 업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부흥으로 디즈니의 독주는 차차 깨져갔다. 그러나 1989년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를 시작으로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킹에 이르는 4개의 작품으로 디즈니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94년 라이온킹 이후 디즈니는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을 내놓지 못했으나 2013년 겨울왕국을 내놓으며 다시 비평과 상업적인 면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