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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도화지113
하얀도화지11323.06.27

조선시대 때 조세는 어떤식으로 거두들였나요?

안녕하세요

국가에서 국민들을 상대로 세금을 걷는데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텐데요

옛날 조선시대 때는 어떤 식으로 세금을 거둬들였나요?

그 당시에는 화폐보단 쌀이 더 흔했기 때문에, 쌀로 조세의 의무를 다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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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조세에는 전세, 역, 공납 이 있었는데여

    전세는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이였습니다.

    토지에서 생산하는 수확량의 일부를 거두는 방식으로 전세를 거두었으며, 사실상 대부분의 조세수입이였다고 합니다.

    역은 16세에서 40세의 남성에게 부과되었는데 군역과 요역으로 나누어서

    군역은 일정기간 군복무를 하는 것이었고,

    요역은 성, 왕릉, 저수지 공사등 국가적 토목 사업에 동원되어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납은 각 호에 부과하는 것으로 주로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특산물의 생산량이 일정하지 않고 운반과 저장에도 어려움이 있어 여러가지 페단이 일어나 백성의 부담이 컷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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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조세수입은 전세(田稅)·역(役), 그리고 공납(貢納)이 그 기본이었다. 전세는 농토에 부과되는 세금으로 과전법에서는 1결에 최고 30두(斗)까지만 받게 하였고, 세종 때에는 이를 더 낮추어 1결에 최고 20두, 최저 4두를 받되, 전분6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으로 구분하여 수취하였다. 정확한 전세의 부과를 위해서는 농토의 정확한 파악이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양전(量田)사업이 20년마다 실시되어 양안(量案)이라는 토지대장이 작성되었다.

    그러나 전란으로 토지가 황폐하고 토지대장이 소실되어 왜란 전의 토지결수(土地結數)에 비해 왜란 후에는 1/3로 감소되었다. 그리하여 개간사업이 진행되고 양전사업이 실시되면서 숙종 때에는 140만 결까지 증가되었는데, 이것은 거의 세종 때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이다. 그러나 은결(隱結)이나 면세지(免稅地)의 증가로 국가의 전세수입은 별로 늘지 않았다.

    또 전세제도가 인조 때 영정법(永定法)으로 개편되어 세율이 1결마다 4두로 경감되었고 이와 같이 수세지와 수세율의 감소로 국가의 전세수입이 현저하게 줄어들자 이를 메우기 위하여 여러 가지 부가세가 징수되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일부 지방에서는 부가세와 수수료를 합치면 1결에 100두, 즉 수확고의 반 이상이 되는 많은 양을 징수하였다. 게다가 관리들은 황폐한 진전(陳田)에서도 세를 징수하였는데 이를 백지징세(白地徵稅)라고 하였고, 또 사적으로 횡령한 공금을 보충하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 하여 정액 이상의 세금을 종종 징수하였다.

    역(役)에서는 국가의 토목사업 등에 동원되는 요역(徭役)과 국방을 맡는 군역(軍役)의 두 가지가 있다. 역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16∼60세까지의 정남(丁男)이었고, 16세기에는 역의 대가로 군포(軍布) 2필을 납부하였는데, 1년에 2필의 포를 납부한다는 것은 무거운 부담이었다. 게다가 탐관오리들의 농간으로 어린아이를 정남으로 편입시켜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죽은 자에 대하여도 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등의 부정이 유행하였고, 무거운 부담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하는 경우에는 이웃이나 친척 ·동리에 부담시키는 인징(隣徵)·족징(族徵)·동징(洞徵)이 가해졌다.

    이에 영조 때에는 군포 2필을 1필로 반감시켰으며, 그 부족액을 어세(漁稅)·염세(鹽稅)·선박세(船舶稅) 등과 결작(結作)의 징수로 보충하였다. 그러나 악습은 여전히 자행되어 농민은 유망(流亡)하게 되고 마침내 민란의 원인이 되었다. 공납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는 세납으로, 각 고을을 단위로 하여 국가나 왕실에서 필요한 지방 특산물을 그 지방의 수령이 책임지고 거두어서 바쳤다. 공납은 현물로 바쳐야 하기 때문에 납입·저장·운반에 어려움이 많았고, 이를 계기로 이른바 방납(防納)이라는 부정이 행해져 국민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이에 방납의 폐단을 제거하고, 전세수입의 감소로 인한 재정 보완을 위해 광해군 때부터 100년간 대동법(大同法)을 추진, 대동미(大同米)라는 이름으로 토지 1결에서 미곡 12두를 징수하게 하였다. 대동법이 실시됨으로써 거의 모든 조세가 전세화되었으니 1결의 토지에서 전세 4두, 삼수미(三手米) 1두 2승, 대동미 12두, 결작 2두 등 20두(斗)에 이르렀다. 이들 세곡은 17세기 이래로 화폐제도가 실시되면서 금납화(金納化)되기도 하였으나, 대개 관선(官船) 또는 사선(私船)을 통해 서울로 조운(漕運)되었으며, 조운을 위하여 연해안 또는 수변에 조창(漕倉)이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조세 제도는 갑오개혁 때에 모두 금납화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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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7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의 조세제도는 조․용․조로 운영되었다. 용(庸)이 성인 남자의 노동력(Services)을 징수하는 것이라면 조(租)와 조(調) 즉, 전조와 공물은 물품을 징수한다. 다만 거두는 물품은 크게 달랐다. 전조는 쌀과 콩을 거두었고, 공물은 쌀과 콩 이외 각종 지역 특산물을 거두었다.


    세종 26년에 성립된 공법은 전조에 대한 개혁입법이고, 후일 성립되는 대동법은 <공물+요역>에 대한 개혁입법이다. 공물에 요역이 따라붙는 이유는 사실 두 가지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별 고을이 공물을 확보하고 중앙에 납부하는 과정에서는 자연히 요역이 동원되었다. 전통사회에서 물건을 운반하는 문제는 오늘날보다 훨씬 큰일이었다.


    오늘날에는 세금을 화폐, 즉 돈으로 낸다. 이것은 우리가 장을 볼 때 필요한 물품을 얻는 대신 돈을 지불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세금은 정부가 다리를 놓고, 군대를 유지하고, 도로를 닦고, 외교를 하는 데 쓰인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세금으로 다리, 무기, 도로, 외교를 사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장바구니에 담기는 쌀이나 고기는 아니지만, 공동체 일원으로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왜 옛날에는 국가가 화폐로 세금을 거두지 않고, 이렇게 복잡하고 번거롭게 세금을 걷었을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답변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돈으로 물품을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돈만 가지면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은 사전에 그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언제나 만들 수 있고(제조),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운반할 수 있으며(운반), 필요한 사람이 집어들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보관(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떤 물건이 필요할 때 시장이나 마트에 가서 살 수 있는 것은, 현대사회가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품에 대해서 생산, 운반, 저장을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은 아무리 길게 보아도 채 100년이 못된다. 지금도 많은 곳에서는 여전히 이것이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국가와 중앙정부의 등장은 현대 화폐경제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특히 중국과 한국이 그렇다. 국가를 운영하려면 노동력과 물자, 오늘날로 말하면 예산이 필요했다. 그 예산은 오늘날과 다른 조건에서 마련되어야 했다. 조․용․조는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탄생한 제도이다.


    시장이 발달하지 못하고, 화폐경제가 작동하지 않는 조건에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자원을 얻는 방법이 바로 조․용․조였다. 간단히 말하면, 전조와 공물은 그것이 생산되는 시기에, 생산되는 장소에서, 생산자에게 직접 요구하여 거두어졌다.

    출처 :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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