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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한다람쥐109
화목한다람쥐10923.09.11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편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역사적으로 근현대 시기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러 외국의 신문물을 받는게.느려졌고 이로인해 뒤쳐져서 일제강점기가 왔다고 생각하는데요

쇄국정책은 왜 펼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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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1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조선이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조선에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쇄국 정책이 필요했습니다. 이외에도, 당시 조선은 농업사회였기 때문에 무역이나 산업 발전이 미미했고, 외국과의 교류가 적었습니다. 이에 따라 쇄국 정책은 조선의 자주성을 강화하고, 국내 산업과 경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원군이 쇄국정치를 한까닭은 두차례의 서양침략

    즉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문입니다.

    이때 척화비를 전국에 세웟는데 서양과 교류하지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새겻다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친 이유는 당시 위에서는 러시아가 기웃거리고 멀리 프랑스는 병인박해라는 사건을 구실로 조선을 침략, 독일은 대원군이 무역을 거절하자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균 묘를 도굴하려 시도합니다.

    즉 양인들이 조선을 도와주는 일이 없고 조선땅에 들어와 어떻게든 빼앗아 가려는 상황이니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근대화보다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이유로 쇄국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63년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국정 전반에 걸쳐 개혁정책을 추구하면서도 외교적으로는 척양척왜론을 주장하면서 청나라를 제외하고는 통상수교를 거부하였고 그 결과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을 야기했으나 양요와 열강의 문호개방에 대한 요구가 맞물리자 전국에 척화비(1871년)를 세워 적극적인 쇄국정책으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외국의 문물로부터 조선을 지키고자 한 것으로 이러한 쇄국정책의결과는 긍정과 부정적 의견으로 나뉩니다. 긍정적인 면은 외국의 통상수교를 거부함으로써 자국의 문물을 보호했다는 측면이 있는 반면 부정적으로는 우리나라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점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흔히 조선시대를 멍들게 한 병폐의 하나로 대원군이 주창한 10년간(1863~1873)의 쇄국정책을 꼽으면서, 이로 인해 조선의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망국을 자초했다는 이른바 ‘쇄국논리’를 편다. 이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한 오해와 식민사관의 잔재, 그리고 자학적(自虐的) 역사관의 소치다.


    조선은 이웃인 중국과 전통적인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서로 사신을 파견하고 각종 교역을 진행했으며, 여진(女眞)과도 변방에 교역장을 설치하고 교역을 활발하게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여진인들을 왕궁 시위(侍衛)로까지 기용하였다. 그토록 모진 배타적 쇄국정책을 강행하는 일본에 대해서도 개방과 교류의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세종 연간에는 매해 200여 척의 일본 선박이 내항하고 약 5,500명의 일본인들이 왕래했으며, 16세기 중반까지 부산 · 울산 · 진해의 3포(浦)를 일본에 개항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후 207년간 총 13회에 걸쳐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했으며, 1609년에는 을유조약을 체결해 무역을 법적으로 보장하였다. 그리고 멀리 동남아시아와도 약재 · 염료 · 향료 등을 수입하는 등 교류와 왕래를 이어갔다. 이러한 비(非)쇄국적인 개방은 학문세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1614)과 최한기(崔漢綺)의 『지구전요(地球典要)』(1857),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1895) 등 당대의 대표적 저술에서는 중화주의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넓은 세계로 눈을 돌리는, 닫힘이 아닌 열림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쇄국’의 장본인인 양 치부되어온 대원군에 대해서도 재조명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는 의정부(議政府)와 3군부의 기능을 회복하고, 세도(勢道)정치의 온상인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함으로써 세도정치를 청산하려고 하였다. 문무 차별 없이 능력 위주로 인사를 등용하고 붕당(朋黨) 근거지인 서원(書院)을 철폐(47개만 남김)하는 등 인사개혁을 단행하였다.


    대원군은 또한 환곡(還穀)제도를 폐지하고 사창(私倉)제도를 개혁하였으며, 마을 자치를 실시하는 등 사회경제 개혁도 추진하였다. 그는 금 5만 냥을 갹출해 화포와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해 국방을 강화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대원군은 보수적인 쇄국주의자가 아니라 진취적인 개혁주의자였다.


    자율적이고 내재적인 힘에 의해 바야흐로 근대화라는 정상궤도를 따라 전진하고 있던 조선이 서구열강과 일본의 무분별한 내침적(來侵的) 도발로 인해 그 궤도가 가로막히자 대원군은 임기응변의 방편으로 ‘척양척왜(斥洋斥倭)’와 같은 쇄국정책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조 전 기간의 열림을 감안하면, 쇄국은 일시적 몸부림에 불과하였다. 이 일시적 몸부림만 보고 조선의 500여년에 걸친 긴 열림을 외면하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단견(短見)이고 편견(偏見)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실크로드 사전



  • 안녕하세요. 이태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편 이유는 서양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서양 열강은 조선을 포함한 전 세계를 침략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역시 서양 열강의 침략을 받으면서, 이를 막기 위해 쇄국정책을 편 것입것입니다.

    그리고 쇄국정책음 조선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흥선 대원군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 조선의 전통이 훼손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서양의 문물을 배척하고 조선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쇄국정책을 편 것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1866년부터 1873년까지 쇄국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기간 동안 조선은 서양 열강과 통상을 거부하고, 천주교를 박해했습니다. 또한, 서양 문물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쇄국령을 내리고, 서양인들의 입국을 금지했습니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서양 열강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결국은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서양의 침략에 대한 우려입니다. 1866년 7월 프랑스의 군함이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와 1871년 5월 미국의 군함이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는 조선을 큰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서양의 침략을 막기 위해 쇄국정책을 통해 서양과의 접촉을 차단하고자 했습니다.


    둘째는,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배타적 성향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유교의 전통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인물로, 서양의 문화와 문물을 오랑캐의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 조선의 전통 문화가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쇄국정책을 통해 서양의 문물 유입을 막고자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서양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결국, 조선은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개항을 하게 되었고, 쇄국정책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당시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흥선대원군의 개인적인 가치관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