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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굳센때까치2923.09.27

발해의 건국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대조영이라는 인물을 알고 싶습니다.

발해의 건국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대조영이라는 인물을 알고 싶습니다. 대조영이 발해 건국에 어떤 기여를 했으며, 그의 생애와 더불어 어떤 리더십으로 발해를 세우는 데 일조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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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국외로 추방시켰으나 영주지역에는 적잖은 고구려 유민들이 있었습니다. 당나라의 가혹한 통치로 거란인들이 봉기하여 영주일대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때 대조영은 말갈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합니다. 대조영은 걸사비우가 전사한 후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해 계속 동진하다가 천문령전투에서 이해고가 이끄는 무주군을 격파하고 다시 동진하여 지금의 길림성 돈화현 위치의 동모산에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국가의 기틀을 3년만에 잡았다고는 하나 기록이 전무하여 알 수는 없으나 천문령전투의 승리로 고구려 유민들을 흡수하여 그때까지 무주공산인 고구려 영역 땅에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나당전투에서 당나라의 패배로 세력이 미치지 않았고 신라의 지배 또한 미치지 못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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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조영은 발해를 건국한 초대 왕으로 고왕에 관해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에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 출신으로 서술, 반면 신당서에서는 본래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속말말갈 출신이라 되어있습니다.

    한국측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신라고기, 제왕운기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구장이라 기록, 신라고기에서 고구려 구장 조영은 성이 대씨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버지는 걸걸중상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으며 대씨와 태씨 족보에 의하면 대조영의 어머니는 시씨라 전합니다.

    고구려 멸망 후 옛 고구려 영토에는 당나라가 통제하는 안동도호부가 세워지고 남아있던 고구려 세력 또한 671년 안시성 함락을 끝으로 막을 내리며 이후 대조영 일가는 고구려 영주로 이주, 그 이주의 계기가 강제였는지, 내투였는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각각의 동질성이 강하였던 것으로 보아 이 두 집단은 영주에 예속되어 있을 때부터 집단적으로 당나라에 예속된 일종의 기미주와 같응 양태하에 처해 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696년 영주에서는 당나라의 지나친 억압 정책에 대한 거란의 반란이 일었고 이로인해 생겨난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말갈의 걸사비우는 영주에서의 이탈을 감행, 측천무후의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동쪽으로 이동,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과 전투를 벌이는데 이때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죽고 대조영은 남은 고구려 유민과 걸사비우의 말갈을 병합해 이끌게 되며, 대조영은 698년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의 추격군을 격파해 승리하고 읍루의 동모산 지린성 부근에서 발해를 건국하며 당의 북진 정책을 위협하던 돌궐과 손을 잡아 대당 견제세력을 구축했습니다.

    대조영은 705년 당나라와 화친하고 713년 당나라는 명목상 고왕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부도독으로 책봉, 719년 고왕이 붕어한 뒤 그의 아들 무왕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당나라는 발해를 고립시키고자 하나 고왕은 돌궐과 동맹관계를 형성해 고립관계를 벗어나려 했고 이는 발해 세력이 건국 초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해졌음을 의미합니다.

    700년 발해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 신라와는 나쁜 관계는 아니었으나 친밀한 것도 아니었으며, 신라의 유학자 최치원은 발해의 왕인 고왕이 신라와 수교를 맺고 싶어 사람을 보냈는데, 효소왕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고왕에게 대아찬 이라는 관작을 하사했다는 기록을 사불허북국거상장, 동사강목에서 확인됩니다.

    신라와 발해는 당시 몇차례 교류가 있었으나 친선적인 관계로는 발전하지 못했고 이는 양국이 그 무렵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아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라와 발해가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8세기 초반 발해가 본격적으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양국이 함흥 일대에서 직접 국경을 접하면서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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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 유민과 걸사비우의 말갈을 합병하여 이끌게 된 대조영은 698년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의 추격군을 격파해 승리하고 읍루의

    동모산 (지린성 돈화 부근)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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