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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우람한스컹크18323.09.07

고려에는 오등작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임명되었나요?

고려는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의 형식을 갖추어 오등작을 임명했는데 이 오등작에 임명되는 사람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임명이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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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07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등작은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5등급으로 이뤄지는 제후의 칭호이자 그 서열로 한자문화권에서 도식화한 다섯 작위를 가리킵니다.

    고려 초기에는 원군(院君), 대군(大君), 군(君), 궁군(宮君), 낭군(郎君), 태자(太子), 후(侯) 등이 종실에게 봉해졌습니다. 그 구분에는 일정함이 없고 다만 어머니의 궁호, 원호를 빌린 것이 많습니다. 종친과 공신을 왕으로 봉하는 왕작은 몇몇 종친과 신라 왕실의 후예 등을 대왕과 국왕 또는 군왕에 봉한 예가 일부 확인될 뿐, 제도화 되지는 못했는데, 직접적 왕작의 수여는 드물었으나 오등작 제도를 통해 종친을 공/후/백에 봉작했으며 이들을 총칭 제왕 또는 친왕이라 하고 제왕부를 설치하여 왕작을 한 것과 같은 효과를 냈습니다. 봉작제는 고려 문종 시대에 완비되어 국공은 식읍 3,000호에 정2품으로, 군공은 2,000호에 종2품으로, 현후는 식읍 1,000호, 현백은 700호, 개국자는 500호에 모두 정5품으로, 현남은 300호에 종5품으로 하였으며 식읍의 호수는 중국과 비슷했습니다. 1298년 충렬왕 24년에 제도를 고쳐 대군·원군은 정1품, 제군은 종1품, 원윤은 정2품, 정윤은 종2품으로 정하였습니다. 1356년(공민왕 5)에 오등봉작제를 부활해 관품을 모두 정1품으로 하였습니다. 1362년에 봉군제로, 1369년에 다시 봉작제로, 1372년에 또다시 봉군제로 고쳤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등작에 임명하는 기준으로는 공로와 덕망이 풍성하고 공적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등작 (五等爵)은 공 (公)-후 (侯)-백 (伯)-자 (子)-남 (男) 5등급으로 이뤄지는 제후 의 칭호이자 그 서열로 한자 문화권 에서 도식화한 다섯 작위입니다. 고려는 고려만의 5등작을 만들었는데 바로 국공, 군공, 현후, 개국자, 현남 등 입니다. 이러한 작위는 황제가 내려 주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종의 동모제(同母弟)인 기(基)가 문종 초에 처음으로 평양공(平壤公)이라는 봉작을 받고 그 뒤 후·백의 봉작을 받은 왕족이 계속해서 기록에 나오고 있다.

    그러나 기록에서 왕족의 봉작은 종실의 친존자(親尊者)를 공, 그 다음을 후, 소자(疎者)를 백, 유자(幼者)를 사도(司徒)·사공(司空)이라 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자료는 얼른 보면 왕족이 오등봉작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공·후·백만 봉작이고, 사도와 사공은 공·후·백의 봉작을 받은 왕족의 아들에게 주어진 관직일 뿐만 아니라, 자·남을 사용한 예는 보이지 않으므로 왕족은 삼등봉작제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에 반해 비왕족, 즉 문무백관과 이성제군(異姓諸君)은 공·후·백·자·남의 오등봉작제를 사용하였다. 비왕족에 대한 봉작의 실례가 처음 기록에 보이는 것은 980년(경종 5)에 최지몽(崔知夢)이 동래군후(東萊郡侯)를 받은 것이며, 계속해서 공·후·백·자·남의 봉작을 받은 기록이 나온다. 이로 보아 비왕족에 대한 봉작은 적어도 경종 때 성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제도적으로 완성된 것은 문종 때로, 국공(國公)은 식읍 3,000호에 정2품으로, 군공(郡公)은 2,000호에 종2품으로, 현후(縣侯)는 식읍 1,000호, 현백(縣伯)은 700호, 개국자(開國子 : 縣子의 잘못인 듯함.)는 500호에 모두 정5품으로, 현남(縣男)은 300호에 종5품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