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넘의 생애와 경력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은 미국의 하원의원, 엔터테이너, 기업인, 사기꾼으로 60대에 서커스 사업을 시작해 링링 브라더스 앤드 바넘&베일리 서커스 서커스단을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1824년 ~1854년까지 민주당 소속이었고 1854년 ~1891년까지 공화당 소속이었습니다.
1분마다 호구가 한명씩 태어난다 라는 미국의 속담이 그가 처음 한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증거는 없으며 바넘은 코네티컷주에서 여관주인이자 재단사인 아버지와 그의 두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고 20대 초반에 사업을 시작해 신문사를 운영, 1834년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뉴욕의 다양한 극단에서 활동하며 엔터테이먼트 경력을 쌓았고 뉴욕의 한 박물관을 구입한 그는 박물관의 이름을 바넘 아메리카 박물관으로 바꾸고 자신의 엔터테이먼트 사업의 홍보처로 사용, 이 박물관에서 피지 인어, 톰 썸 장군, 미국 최초의 수족관 등의 전시물로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으며 80대 흑인 여성을 160살이 넘은 조지 워싱턴의 간호사라고 홍보하고 그녀가 사망한 후 해부해 전시했습니다.
또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이라 불리던 소프라노 제니 린드의 미국 투어를 홍보했습니다.
1865년 코네티컷주의 공화당원으로 코네티것 입법부에서 두번 역임, 그는 에이브러햄 링턴의 지지자였으며,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활동했으며 1875년 시장으로 선출되어 조시의 수도 시설과 서리의 가스 등을 설치, 주류와 매춘관련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최초의 비영리 병원인 브리지 병원의 초대회장이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화 <위대한 쇼맨>으로도 유명한 바넘은 20대부터 본격적인 흥행사 면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늙은 노예의 전시권을 사들여 161세라고 소개하면서 사람들을 불러모은 것이 시작인데 이후 거인증이나 왜소증 등을 앓으며 숨어 있었던 인물들을 무대 전면에 내세운 공연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고 합니다. 대중이라는 집단의 위력과 특성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던 그는 입소문 마케팅, 노이즈 마케팅 등 오늘날에도 쓰이는 마케팅의 기술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던 그는 시대를 앞서간 마케팅 전문가 로도 볼수 있습니다. 그는 장사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야바위의 제왕'으로 불리기를 자청했는데 그도 여러 차례 사기당했고 미국 경제의 침체 속에서 벼랑 끝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그는 집요함과 뚝심으로 위기를 벗어났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해 그는 많은 유행어를 남겼는데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겸손이랍시고 재능을 숨기지 마라 . 갑작스러운 부는 불행보다 더 모진 시련이다 . 친구들 도움을 믿지 마라> 등 사업가들을 위한 바넘의 조언은 그가 단순한 야바위 꾼이 아니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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