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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거북이38
활달한거북이3823.03.21

일제 강점기 때 헤이그특사사건은 무엇인가요?

우리나라 대통령이 일본의 방문 후 기자회견을 하는데,

대통령 발언에 대해 이야기하는 뉴스가 많습니다.

이에 예전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에 대해 찾아보고 있는데,

일제 강점기 때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했다는 내용이 있던데,

헤이그특사사건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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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1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907년(광무 11)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고종은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취지의 밀서를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 검사 이준에게 전하고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도록 합니다. 이들 대표들은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를 거쳐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서 러시아 황제를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전 러시아공사관 서기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장을 만나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을사조약은 일본의 협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일본은 네덜란드 정부와 의장인 러시아대표 넬리도프와 공모하여 대한제국의 특사들을 아예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특사들은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대표들을 방문하고 각 신문에 일본의 침략행위를 폭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호응과 동정만 얻었을 뿐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여 이준은 끝내 울분을 참지 못하고 헤이그에서 화병으로 사망합니다. 이것이 헤이그특사사건인데 일본은 사건의 배후에 고종이 있음을 알아채고 그를 문책하여 덕수궁에 가두고 협박을 일삼아 1907년 7월 20일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헤이그특사사건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을 말합니다.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도발 이후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습니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구미 열강이 일제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도록 조처한 뒤, 1905년 11월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해 ‘보호국’으로 삼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이 조약을 인준하지 않았고 기회만 있으면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내보냈습니다. 미국의 헐버트(Hulbert, H. B.) 박사에게 전보를 보내 그 곳에서 조약 반대운동을 벌이게 한 것도 이 즈음의 일이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러나 끝내 회의 참석이 거부되자 우분울읍(懮憤鬱悒)하던 끝에 이준이 7월 14일 순국하게 되었다. 특사 일행은 만국평화회의가 끝난 뒤에도 구미 각국을 순방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제국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열강간의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개최되었던 만국평화회의의 성격상 일제에게 외교권마저 유린당한 한국의 특사 일행이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처음부터 어려운 상황이었다. 표면적으로 고종의 특사 파견은 큰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일제의 한국 침략을 가속화시킨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세계 열강에게 한국이 주권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으며 일제의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최초로 알렸다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7월 18일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林董]를 서울로 불러들여 그와 함께 고종에게 특사파견의 책임을 추궁,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켰다. 또한, 7월 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하고,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을, 29일에는 집회,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연이어 공포하였다. 31일에는 드디어 군대해산령을 내려 대한제국을 무력화시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헤이그특사사건 [─特使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일제가 1905년 11월 한일협약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하게 됩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일제는 차근차근 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황제의 친서와 함께 신임장을 휴대시켜서 헤이그로 보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일행들에게 회의에 참석하여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고 이를 파기 하고,

    세계에 우리의 현실을 알리고 도움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헤이그까지 갔지만 사전에 이 사실이 일제에 알려지면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준 열사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분사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고종의 모든 권한을 박탈하는 무도를 저지릅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특사를 보내 일본의 만행을 알리게 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고, 일본은 이 사건을 문제 삼아 고종을 퇴위시키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은 1907년 고종이

    당시 개신교 감리교회의 지원을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한

    특사로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통역관 이위종과 이들을 도울 호머 헐버트를

    파견하였던 사건이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은 일제의 강제적인 주권 침략 행위를 대외적으로 알리고자 했으며 헤이그특사사건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입니다. 당시에 이준열사를 여기에 파견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성사 되지 못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헤이그특사는 고종의 비밀특사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의 식민화착업을 본격화했습니다. 제2차영일동맹,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보장했지요. 러시아와는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러일간 세력균형을 깼습니다. 이제 한반도를 집어삼키는 데 아무런 장해물이 남지 않은 것이지요.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요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그 중심이었는데, 고종은 반대했습니다. 정부 대신들도 대부분 반대했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에 몇 대신이 의견을 바꾸었습니다. 이에 동의한 정부 5대신이 바로 을사오적인 것입니다. 고종의 서명과 동의가 없었기에 이를 무효라는 의미와 강제조약이라는 의미로 을사늑약이라고 부르지요. 을사늑약의 핵심은 통감부를 설치해 외정을 담당하게 하는 것인데 외교권의 박탈을 의미합니다.

    이에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3명을 비밀리에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 하였습니다. 일본이 외교권이 없는 조선대표는 입장할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가 통해 특사는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에 이준 열사가 분을 참지 못하고 그 부당함을 죽음으로 알리었습니다.

    일제는 헤이그특사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고 경찰권 사법권을 가져가고 이어 우리를 병합했던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은 1933년 7월 23일에 발생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인권 침해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네덜란드(헤이그)의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니케스(Nikkes)라는 네덜란드인 직원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금된 뒤, 가혹행위로 인해 사망한 사건입니다.


    니케스는 네덜란드에서 일본으로 파견되어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33년 7월 22일 밤, 일본 경찰이 니케스를 체포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니케스는 일본 경찰에 의해 가혹행위를 당하고, 결국 7월 24일에는 사망하게 됩니다. 니케스의 사망은 일본에 대한 네덜란드의 비판을 촉발하였으며, 네덜란드 정부는 이 사건을 규탄하고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하는 등의 대응을 취했습니다.


    이 사건은 네덜란드와 일본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일제강점기 일본의 인권 침해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후에도 일본은 인권 침해와 관련된 다양한 사례를 일으켰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지금까지도 일본과 인접한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한도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한국의 역사에 중요한 사건주으이 하나입니다.^^

    당시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이 일본에게 통보되어 회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당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갈등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조.


  • 안녕하세요.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헤이그 특사란 1907년 고종이 일본의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조선을 강제병합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부당하다고 알리기 위해 일본의 감시를 피해서 이준 열사 등 3명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 회담에 보낸 일 입니다.

    이때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을사조약으로 인하여 빼앗은 상태였고 조선이 자발적으로 원하여 일본에게 합병을 요구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싶은 일본에게는 껄끄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사절단은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장에 들어 가지도 못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하게 되었습니다.(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강하게 압박함) 제 답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해이그사건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적

    활동을 했던 사건을 말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헤이그특사사건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활동입니다.

    그러나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의 방해공작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으며 일본은 헤이그특사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지워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차관정치를 실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