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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0

고려시대 있었던 노비안검법에 대해 궁금한게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왕건이후로 호족세력을 압박하는 정책들을 실시하였으나 큰 성과가 없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노비안검법이라는게 생겼다고 들었는데 어떠한 정책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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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비안검법은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하여 다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조처한 법을 말합니다. 고려 광종때 실시한 제도이며 고려 건국 과정에서 포로가 되어 노비가 된 사람들 또는 호족들이 강해진 세력을 바탕으로 양인을 강제로 노비로 삼기도 하였어요. 특히 호족이 소유한 노비는 토지와 함께 그들의 중요한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되었어요. 이는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제한해야 할 필요가 있었지요.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비안검법을 실시함으로써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자들의 신분을 되찾아주었답니다.

    그 결과 호족의 노비였던 사람들이 양인이 되어 세금을 납부하기도 하는 등, 고려의 경제력에 도움이 되었어요. 한편, 호족의 사병으로도 이용되던 노비의 수가 감소되어 호족의 힘이 약해졌어요. 이는 곧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답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956년(광종 7)에 실시하였습니다.

    신라 말·고려 초에 전국의 대소 호족들은 각각 토지와 노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식시켜 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에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호족에게 노비가 증대된다는 사실은 곧 호족의 세력이 비대해져 왕권에 대한 위협도 증대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태조 때부터 호족의 노비소유에 대해 제한을 가하려했으나 호족세력의 반발을 우려하여 편의에 좇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지향했던 광종은 노비의 안검을 명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광종은 본래 양인으로 고려의 통일전쟁 때 포로가 되어 노비가 된 자들과 호족들이 스스로의 세력을 믿고 강제로 노비화시킨 자들을 본래의 신분인 양인으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이러한 노비안검법의 시행은 표면적으로는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의 신분을 바로 찾아준다는 의미였다. 실제로는 호족들의 사유물로 그들에게 귀속되던 세를 국가의 세로 전환시킨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족의 사병으로도 이용되던 노비의 수효가 격감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호족세력의 약화와 왕권의 신장이라는 이중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안검의 대상이 된 노비는 주로 노비 자신들의 신고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조처는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특히, 대목왕후는 이 법의 폐지를 간곡히 간했으나 실패하고, 광종 때에는 계속해서 강행되었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비안검법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11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비안검법은 고려 초기 광종 때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해 다시 양인이 될수있도록 조처한 법입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고려는 왕건 이래로 호족세력을 억압하는 정책을 실시하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광동 대에 과거제 시행, 사색공복제 제정, 칭제건원 등과 함께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노비안검법을 실시했습니다.

    당시 호족은 후삼국의 와중에서 전쟁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갚지 못했거나 그 밖의 강제적인 방법으로 양인에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많이 소유했고, 이러한 노비는 호족이 소유한 토지와 함께 그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되었고, 이는 국가의 입장에서 볼때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제한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956년 광종은 노비의 안검을 명령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인을 회복시켜주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노비안검법은 노비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법에 따르면, 노비들은 주인의 허락 없이 집을 나가거나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노비는 주인의 범죄나 싸움에 관여하면 벌금이나 매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나의 하루는 매우 힘들었습니다. 나는 노비이기 때문에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힘든 일이 없어서 오후에는 좀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후에, 주인이 갑자기 나를 부르며 일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미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화를 내며 나를 끌고 나가서 때렸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몸에 아픈 자국이 남았습니다.

    나는 이 일을 일기에 적어서 기록해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끝없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억압과 차별이 없는 세상에서는, 노비안검법이라는 법은 노비들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 말 고려 초에 전국 각지에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했던 호족들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토지와 노비를 늘려 자신들의 경제적⋅인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는 왕권을 크게 위협하고 국가의 통치 기반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지향했던 광종(光宗, 재위 949~975)은 노비안검법을 단행하여, 후삼국 통일 전쟁 과정에서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되었거나 호족 세력에게 눌려 강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본래의 신분인 양인으로 회복시켜 주었다.

    -출처:우리역사넷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선 신라 말 고려 초에 전국 각지에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했던 호족들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토지와 노비를 늘려 자신들의 경제적⋅인적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왕권을 크게 위협하고 국가의 통치 기반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지향했던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단행하여, 후삼국 통일 전쟁 과정에서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되었거나 호족 세력에게 눌려 강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본래의 신분인 양인으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노비안검법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준다는 명분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호족의 토지를 경작하고 사병 역할을 하던 노비를 감소시켜 호족의 인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세금을 내는 양인을 늘려 국가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노비안검법을 실시함으로써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신장하는 두 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책은 호족 출신 인사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심지어 광종의 비인 대목 왕후까지 이 법을 폐지하자고 청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광종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한 후 광종 대의 정치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면서 노비안검법은 폐지되었고, 987년(성종 6) 노비환천법이 실시되어 해방된 노비 중 다시 노비 신분으로 환원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광종 때 호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본래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안검하여 방량(放良)하게 한 정책. 고려 광종 때 호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본래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안검하여 방량(放良)하게 한 정책.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비안검법은 고려 광종 7년(956)에 본디 양민 이었던 노비를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만든 법 입니다.

    통일 신라 말기. 고려초기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킨 것으로 호족이 소유한 노비를 풀어줌으로써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수많은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주거나(사성정책), 혼인을 통해 자신의 사돈으로 만드는 등 적극적인 호족 포섭 정책을 통해 후삼국을 통일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이게 딱 통일된 그 때까지만 좋았다는 것. 29명의 부인들에게서 25명이라는 많은 수의 아들을 두었던 만큼 당장 왕건 본인의 말년 무렵부터 후계 구도를 놓고 호족들 간에 다툼이 일어났고, 태조의 적장자였음에도 상대적으로 세가 약했던 외가 탓에 간신히 태조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혜종은 왕규의 난에서 보듯 재위기간 내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급급하다가 요절하고 만다.혜종의 뒤를 이은 정종 역시 호족들의 기득권을 뒤흔들기 위하여 북벌을 기치로 내걸어 서경 천도를 시도했지만 급사 크리.그렇지만 정종의 뒤를 이은 동생 광종 역시 포기하지 않고 호족들을 억제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그리고 이러한 시도 중 하나로 등장한게 바로 노비안검법.


    이 당시 호족은 후삼국끼리 싸우는 와중에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갚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로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다. 당시 관념상 노비는 당연히 재산으로,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으로 자리잡았고, 이는 필시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눌러야 할 것들이었다. 물론 이런 속마음을 대놓고 명분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에 광종이 내건 명분은 "신라-고려의 왕조 교체기를 통하여 혼란했던 사회적 신분 질서를 바로잡는다"였다. 이를 통해 호족의 세력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양인 계층으로 포섭된 해방 노비들은 세금을 내게 됐으므로 그야말로 일석이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