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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04.27

인조반정은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인조반정은 조선 후기시대때 일어난 쿠테타라고 알고 있는데요 어떠한 경위로 반란을 일으켰는지 알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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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7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반정은 1623년(광해군 15) 이귀(李貴)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倧: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입니다.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임해군이 불궤(不軌: 법을 어김)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 그 뒤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감 이직(李稷)에게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칠서지옥(七庶之獄: 서얼 출신 7인이 은상인을 살해한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옥사)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였다. 선왕의 유교칠신(遺敎七臣: 유훈을 받들은 일곱 신하) 중 재직자인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서성(徐渻)·한준겸(韓浚謙)을 내쫓았다.

    이어 영창대군을 처형하라는 주장이 일어나자, 이이첨의 뜻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8세의 어린 영창대군을 살해하였다. 또, 정원군(定遠君: 인조의 아버지로 뒤에 원종으로 추존)의 아들 능창군 전(綾昌君佺: 인조의 아우)을 교동에 금고하였다가 살해하였다.

    대비 김씨에 대해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중 1617년에 이르러 폐모론이 대두되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및 정홍익(鄭弘翼)·김덕함(金德諴) 등이 반대하자, 오히려 이들을 멀리 귀양보냈다.

    그 뒤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의 발론(發論)을 계기로 대비 김씨의 존호(尊號)를 폐하여 다만 서궁(西宮)이라 칭하고, 공봉(供奉: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바침)을 감하고 조알(朝謁: 왕을 조정에서 찾아뵘.)을 중지시켰다.

    그런 뒤에도 실권을 행사하던 이이첨은 1622년 12월 강원감사 백대형(白大珩)을 시켜 이위경(李偉卿) 등과 함께 굿을 빙자해 경운궁(慶運宮)에 들어가 대비를 시해하려 하였으나,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등이 급히 이르러 추방해 실패한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의 존호를 박탈하고 동생을 살해함.) 등의 사건은 지금까지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 일파에게 반동 투쟁의 중요한 구실을 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조반정 [仁祖反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과 유일한 적통 영창대군을 경계하여 먼저 임해군에게 불궤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교동을 옮기고 그 뒤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 이항복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감 이직에게 살해하게 합니다.

    그리고 칠서지옥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였으며 선왕의 유교칠신 중 재직자인 신흠, 박동량, 서성, 한준겸을 내쫓았습니다.

    이어 영창대군을 처형하라는 주장이 일어나자 이이첨의 뜻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이 8세의 어린 영창대군을 살해,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 전를 교동에 금고했다가 살해합니다.

    대비 김씨에 대해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중 1617년 폐모론이 대두되고 영중추부사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 및 정홍익, 김덕함 등이 반대하자 오히려 이들을 멀리 귀양보냅니다.

    그 뒤 우의정 한효순의 발론을 계기로 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하여 다만 서궁이라 칭하고 동봉을 감하고 조알을 중지시킵니다.

    뒤 실권을 행사하던 이이첨은ㅇ 1622년 12월 강원감사 백대형을 시켜 이위경 등과 함께 굿을 빙자해 경운궁에 들어가 대비를 시해하려 하나 영의정 박승종 등이 급히 이르러 추방해 실패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광해군의 폐모살제 등의 사건은 지금까지 대북파에 눌려 지내던 서인 일파에게 반동 투쟁의 중요한 구실을 주었고 서인의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은 이를 이유로 무력정변을 기도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명나라를 섬기지 않고 후금과의 '중립외교'를 하면서,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자 이를 명분으로 삼아 능양군(후의 인조)와 김자점, 김류, 이귀 등이 광해군을 쫓아낸 것이 인조반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 - - 추가적으로 궁금하신 점은 의견으로 남겨주시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려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