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은 어떤 이유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시행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왕조는 1636년 병자호란 이래 수세기 동안 대체로 사대교린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 쇄국정책을 고수했습니다.
1863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국정 전반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나 외교적인 면에서는 청나라를 제외하고 척양척왜를 주장해 쇄국정책을 유지했는데 천주교의 유입을 단호히 배격해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까지 두 차례에 걸친 양요가 일어나기도 했고 이러한 양요의 열강의 문호 개방에 대한 요구가 맞물리자 척화비를 세우며 적극적인 쇄국정책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이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했었던 이유로는 당시 서양의 세력이 동양을 점령 하던 시기로 프랑스,영국 등이 교역개방을 요구하며 청나라의 북경까지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조선에서는 제네럴셔먼호사건, 병인양요와 더불어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하면서 까지 통상수교를 요구했었기에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63년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국정 전반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외교적인 면에서는 청나라를 제하고는 척양척왜를 주장하여 쇄국정책을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특히 천주교의 유입을 단호히 배격하여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까지 두 차례에 걸친 양요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러한 양요와 열강의 문호 개방에 대한 요구가 맞물리자 전국에 척화비(1871년)를 세워 적극적인 쇄국정책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처음부터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채택한 것은 아닙니다. 제2차 아편전쟁을 중재한 러시아가 연해주를 얻게 되자 조선은 서양과 국경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 서양 이양선들이 통상을 요구하였고 조선 정부와 대원군은 위협감을 느꼈습니다. 청나라도 서양에 패배한 소식이 전해졌기도 했고요.
그리하여 대원군은 러시아를 이용해 서양세력을 막고자 교섭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으며 프랑스 선교사와도 접촉해 교섭을 시도했지만 이것도 실패했습니다. 양반들의 반대가 심해 이를 누르려 병인박해를 일으켰고 이에 프랑스 해선이 강화도를 공격하고 약탈한 병인양요도 일어났지요.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신미양요도 일어났으며 이에 먼저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원군묘를 도굴하기도 했지요.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채택하게 되었으나 대원군 하야 후 정권을 장악한 민씨세력에 의해 조선은 일본에 개항하는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팽창과 영향력 확대, 서구 열강의 지역 확장 시도에 맞서 조선의 독립과 안정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수교 거부 정책은 기본적으로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에도 외세와의 교역 및 외교 관계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강화도조약은 1876년 일본과 체결한 불균형 조약으로, 공격적인 개항 정책을 추진하던 일본에 의해 강요된 조약입니다. 그래서 대원군은 일본과 서구 열강으로부터 자주권을 지키고자 했고, 이를 위해 외부 세력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이려 했다.
실제로 대원군의 외교 관계 수립 거부 정책은 "물금사신주의", 즉 "왜구(왜인)와 양반(서양인)에게는 사신을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이 원칙은 전통적인 쇄국주의 정치 철학인 '관동삼불가(중요한 문서를 주지 않는다)'에 따른 것으로, 대원군은 왜구와 양반을 모두 조선의 왕인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