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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1

기독교는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나요?

우리나라에도 여러가지 매우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해관계도 복잡하기도하고 여러 사이비종교도 판을 치고있습니다. 그런데 종교들 중에서도 기독교는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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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리함
    누리함23.05.21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개신교의 수용은 일찍이 1816년 영국출신의 홀(Hall, B.)에 이어, 1832년 독일 태생의 구츠라프(Gutzlaff, K. F. A.), 그리고 1866년 영국의 토머스(Thomas, R.), 1867년 스코틀랜드의 윌리암슨(Williamson, A.) 등에 의해 꾸준히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과 없이 내려오던 중, 1873년(고종 10) 조선선교에 뜻을 두고 만주 통화현(通化縣) 고려문(高麗門)에 진출한 스코틀랜드의 일치자유교회 출신의 로스(Rose, J.)와 그의 매부 매킨타이어(McIntyre, J.)가 그곳에서 마침내 의주출신의 청년학자 이응찬(李應贊) · 이성하(李盛夏) · 김진기(金鎭基) · 서상륜(徐相崙) 등을 만나, 그들에게 성서를 가르치면서 함께 성서번역에 착수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1876년에 개신교에 입교하였고, 1882년에는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의 번역이 완료되어 만주 심양에서 이를 간행하였으며, 1887년에는 마침내 『예수셩교젼셔』라 하여 신약성서 전부가 간행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례를 받은 187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가 출발한 셈입니다.


    한편, 이수정(李樹廷)은 전직 통리아문협판(統理衙門協辦)으로 수신사 박영효(朴泳孝) 일행에 끼어서 1882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개신교에 입교하고, 1885년에는 그가 번역한 『신약마가젼복음셔언ᄒᆡ』가 요코하마(橫濱)에서 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 G.)가 일본에서 이 책을 구해서 1885년 4월에 인천에 상륙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서상륜이 1884년 봄 그의 고향인 황해도의 장연 · 송천(松川, 솔내)에서 전도하여 교회당을 세운 사실과 함께, 우리나라의 개신교회가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확립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1887년 9월에 서울에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세워졌을 때 교인 14명 중 13명이 서상륜을 통해서 이미 입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신교의 선교는 미국의 북장로교에서 먼저 착수하였는데,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의료선교사 알렌(Allen, H. N.)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884년 9월 22일이었습니다. 개신교 선교의 외교적 허가가 외국과의 수호조약에 명기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그는 처음에 미국공사관의 공의(公醫) 자격으로 입국하였습니다.


    그는 그 해 갑신정변으로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서양의술로 치료하여 민척(閔戚)과 왕실의 신임을 얻게 되어 1885년 4월 광혜원(廣惠院)을 개원하였고, 이를 계기로 선교의 문호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달에 북장로교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북감리교의 아펜젤러(Appenzeller, H. G.)가 인천에 왔으며, 5월에 북감리교의 스크랜턴(Scranton, W. B.)모자가 도착하여 그의 어머니는 곧 이화학당을 세웠으며,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워 1886년 여름부터 개교하였습니다.


    또한,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의 레이놀드(Reynolds, W. D.) · 테이트(Tate, L. B.) · 젠킨(Jenkin, W. M.) 등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전라도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하였고, 남감리교에서는 윤치호(尹致昊)의 기금이 자극이 되어 1895년 10월에 리드(Reid, C. F.)를 우리나라에 파송하여 개성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성공회는 1891년에,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선교부는 1889년에, 캐나다 장로교는 1893년에, 침례교(浸禮敎)는 1889년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第七日安息日─再臨敎: 약칭 第七日安息敎)는 1904년에, 성결교(聖潔敎)는 1907년에, 구세군은 1908년에 각각 특징 있는 선교를 전개하였습니다.


    즉, 감리교는 선교역량을 교육과 부녀사업에 치중하였고, 장로교는 네비우스방법이라는 토착과 자립원칙의 선교정책을 적용하여 서북지방에서 복음전파를 중심으로 한 선교를 추진하였으며, 구세군은 처음부터 사회봉사와 자선사업에 치중하였고, 침례교는 만주와 시베리아지방으로 선교방향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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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였다. 청일전쟁이 보여 준 전통적인 유교의 한계와 동학혁명의 실패, 그리고 서양문명의 위력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정부는 갑오경장을 통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출처:한국기독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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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독교의 전파방법 ~그당시 일부 일반인들은, 성서의 천동설을 버렸지만, 그 시대의 종교인들은, 여전히 성서의 천동설을 믿었고, 신대륙발견으로, 해외 침략과 식민지개척을 근간으로, 기독교 전도에 몰입함. 특히 멕시코등 중남미에서는, 유카탄반도등의 현지 종교의 신전을 부수고, 그위에 성당을 세우는등 종교적 만행을 자행하였다..



    식민지가 아닌 나라에서의 전도는, 돈을 앞세워 수혜를 베푸는 척하며, 기독교 교육을 위한 학교와 기독교 치료원을 세워주고, 그 교육과 치료를 앞세워 기독교를 전도를 하였고, 이러한 전도행위가 그 나라의 전통과 충돌하여 전도를 막으면, 통상과 종교의 자유를 이유로 침략을 하여 전도를 하였다.



    현재 기독교(카톨릭,개신교)가 천동설을 믿지 않는 다고 주장하려면, 당연히 천동설을 주장하는 성서를 쓰레기통에 버리든지, 아니면 기독교를 버려야, 진정 천동설을 믿지 않는다 할것입니다. 겉으로는 천동설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성서를 믿으며 전도하는 것은, 성서의 천동설을 믿고 전도하는 얼간이 같은 행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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