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이 탄핵을 당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임진왜란이 끝나고 유성룡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는데요 영의정의 자리까지 올라 임진왜란당시 큰 역할을 했던 유성룡이 탄핵을 당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성룡이 탄핵 된 이유가 궁금하군요.
유성룡은 전국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게 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를 편성했습니다. 다시 신임을 얻은 유성룡은 영의정 자리를 되찾아 1598년까지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이해 일본과의 화친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씌운 북인 세력의 거센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되었다고 합니다. 억울함을 안고 이듬해 고향인 하회마을로 낙향했으나, 갑작스런 낙향으로 마땅한 거처조차 없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성룡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 북인의 거듭된 상소로 탄핵되게 되는데,
탄핵의 이유가 일본과의 화친을 주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고향인 하회마을로 낙향하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성룡의 나이 51세가 되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는 왕의 특명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면서 군기를 관장하게 되었고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벼슬에 올라 풍원부원군이 되었다. 이듬해 호서, 호남, 영남을 관장하는 삼도 도체찰사라는 직책을 맡아 전시 상황의 군사 업무를 관장했다.
유성룡은 전국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게 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를 편성했다. 다시 신임을 얻은 유성룡은 영의정 자리를 되찾아 1598년까지 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해 일본과의 화친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씌운 북인 세력의 거센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되었다. 억울함을 안고 이듬해 고향인 하회마을로 낙향했으나, 갑작스런 낙향으로 마땅한 거처조차 없었다.
고향인 하회에서 은거하는 동안 그의 누명은 벗겨지고 관직은 다시 회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상처는 회복되지 않아 7년간 왕의 부름에도 거절하며 고향을 지켰다. 그러는 가운데 1601년 청백리에 녹선(錄選- 벼슬을 추천하여 관리로 뽑음)되었으며, 1604년에는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의 저술을 마쳤다.
그리고 같은 해 학가산 골짜기 서미동에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집을 지어 거처를 옮겼다가 모친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다시 하회로 돌아오기도 했다. 초가집에서 거처하는 동안 유성룡은 “사람들이 이욕(利慾)에 빠져 염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느 곳이든지 살 수 있다”라며 자식들에게 청렴의 중요성을 가르치기도 했다.
1607년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향년 66세로 그곳에서 눈을 감았는데, 유성룡이 세상을 뜨자 선조는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승지를 직접 보내 조문하도록 했다. 상인들은 4일간 장사를 하지 않으며 경세가의 죽음을 슬퍼했다. 또 서울 옛집이 자리했던 묵사동에는 약 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현재 병산서원ㆍ남계서원ㆍ도남서원ㆍ삼강서원ㆍ빙계서원 등에 배향되어 있다.
출처 : 인물한국사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응태 무고 사건(정응태가 명나라 조정에 무고한 사건. "조선과 일본이 합세해서 명나라를 공격하러 온다.")가 발생했고, 이를 해명하기 위해 선조가 류성룡을 보내려고 했으나 류성룡은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북인 세력이 남인의 영수였던 류성룡을 이 일을 빌미삼아 탄핵했고 류성룡은 삭탈관직되어 낙향했습니다. 그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 책을 썼는데, 그 책 이름이 <징비록>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과 일본이 합세해서 명나라를 치러 온다 라고 명나라 조정에 무고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해명하기 위해 무게감있는 대신이 가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 선조 또한 원해서 류성용에게 이를 해명하러 갔다 오라고 부탁했지만 류성룡은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사양합니다.
그런데 북인이 남인의 영수였던 류성룡을 이 일을 빌미삼아 탄핵을 했고 결국 삭탈 관직되어 낙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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