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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2

구스타브 플로베르는 어떤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구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어떤 인물인가요?


그리고 그의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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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루앙 출생. 시립병원 외과부 의사의 아들로 중학시절부터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 《11월》 등을 습작하였다. 파리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 간질(癎疾)과 유사한 신경증이 발작한 것을 계기로 문학에 전념하여, 《감정교육(感情敎育)》의 초고와 《성(聖)앙투안의 유혹》의 초고를 썼다. 그 뒤 낭만파의 영향에 중독된 공상(空想)의 과잉이나 산만한 작풍을 극복하고 확고한 문체와 긴밀한 구성을 가진 《보바리 부인》(1857)을 발표함으로써, 프랑스 당대의 최고 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는 루앙 근교 센 강변에 있는 크로와세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독신의 연금생활자(年金生活者)로서 어머니와, 일찍 죽은 누이동생의 딸, 그리고 늙은 하녀와 함께 조용히 칩거생활을 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를 은둔자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끔 파리로 나가서 E.D.공쿠르, A.도데, E.졸라, I.S.투르게네프 등과 만나서 저녁 식사를 할 때에는 좌담의 명수이기도 하였다. 《보바리 부인》의 극명한 현대 풍속의 묘사에서 일전하여 고대 카르타고의 서사시를 환기시키는 역사소설 《살람보》(1862), 그리고 다시 자전적 요소가 짙은 현대소설 《감정교육》(1869), 또다시 일전하여 고대 이집트 수도사의 환상을 그린 대화형식의 《성(聖)앙투안의 유혹》(1874) 등, 플로베르의 대작은 수없이 많은데 모두가 독자적인 문체를 자랑하는 것들이었고, 주옥 같은 단편집 《세 가지 이야기》(1877)는 그러한 다채로운 문체의 표본처럼 보인다.


    그의 마지막 소설 《부바르와 페퀴셰》(1881)는 그가 급서함으로써 미완성으로 남은 것이다. 그가 젊은 날에 사귄 친구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모파상은 그가 만년에 가장 사랑한 제자였다. 문학사상으로 플로베르가 본격적 사실주의 소설의 창시자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사실 그는 면밀한 자료수집과 현지조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작자의 주관이나 선입견을 작품 속에 반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작가는 몰개성적 태도로써 객관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학관이었다. 그러나 고백이 금지된 작가의 자아(自我)는 오히려 더욱 깊이 침잠된 진실한 모습을 작품 속에 나타내는 결과가 되는 것이므로, “보바리 부인은 나였다”고 전해지는 그 자신의 말에는 거짓이 없을 것이다.

    플로베르는 결코 단순히 겉으로 보는 풍속의 갖가지 양상을 그려내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내부에는 꿈 많은 로마네스크한 자기 자신, 또는 무언가를 천착하기를 좋아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관조하는 소설가의 눈이 항상 번득이고 있어서, 그렇게 관찰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편적인 인간상으로서 보바리 부인이나 부바르나 페퀴셰의 모습으로 그려 내지 않고서는 견디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작가와 작품 사이의 ‘단절(斷絶)’이 바로 ‘관련’이라는 미묘한 존재양식을 밝히는 귀중한 문헌이 그가 죽은 후에 간행된 《서간집》(9권:1926∼1933) 및 그 보충 4권(1954)이다.

    엄격하게 문체를 다듬는 작가로서의 플로베르상(像)은 이미 정착된 지 오래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신비평파의 비평가들은 높은 관점에서, 문학을 결연히 언어의 문제로 환원시킨 최초의 작가로서 플로베르를 누보 로망(nouveau roman:新小說)의 원류(源流)라는 위치에 두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귀스타브 플로베르 [Gustave Flaubert]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23.05.22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1821~1880)는 1821년 프랑스 북부 도시 루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외과 의사였고, 내과 의사의 딸인 어머니는 플로베르의 삶과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바이런의 조숙한 독자이자 셰익스피어의 광적인 팬이었던 십 대의 플로베르는 여행 중에 젊고 생기 있는 연상의 여인 엘리자 슐레징거를 만나게 된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완벽한 여인으로서 슐레징거는 평생 그의 마음속에 있었고, 그녀에 대한 오랜 사랑은 그의 삶과 작품을 결정짓는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열여덟 삶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으나, 신경질환으로 인해 삼 년 뒤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 마을로 돌아와 홀로 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글쓰기에 전념했다.

    초기 작, 특히 『성 앙투안의 유혹』에서 그는 대담한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쳤으나, 이후에는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예술적인 객관성을 획득하고 산문 스타일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낭만주의적인 풍성함을 혹독하게 훈련하였다. 이렇게 예술적 완전성을 갖추기 위한 노력은 그에게 커다란 고역임은 물론 생전에 제한된 성공만을 가져왔다. 1857년에 『마담 보바리』를 출간하고 나서는 대중적인 도덕률을 위반한다는 이유로 기소되었고, 이국적인 소설 『살람보』(1862)는 고고학적인 세부 사항의 외형적 묘사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자기 세대의 도덕적인 역사를 다루려는 『감정 교육』 (1869)은 비평가들의 오해를 샀으며, 정치적 희곡 『후보자』(1874)는 참담한 실패를 겪어야 했다. 『세 개의 우화』(1877)만이 완전한 성공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플로베르의 기분, 건강, 재정이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였다. 1880년 사후에 그의 미완결 유작 『부바르와 페퀴셰』와 『서한집』이 출간되는 것을 기화로 그에 대한 평가가 서서히 힘을 얻고 명성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관습적인 도덕과 사회적인 사실성의 차원을 넘어 진리에 도달하고 미를 창조하려 했던 ‘모더니티’의 대명사 플로베르. 그는 사실주의와 낭만주의, 자연주의와 구조주의에 이르는 현대의 예술 사조를 이끌어내는 씨앗으로서 조르주 상드, 에밀 졸라, 기 드 모파상 등 동시대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19세기 위대한 프랑스 작가다

    [네이버 지식백과] 귀스타브 플로베르 (해외저자사전, 2014. 5.)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스 작가로 꿈 많은 로마네스크한 자기 자신, 무언가를 천착하기를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관조하는 작품을 많이 썼으며 ,신비평파의 비평가들은 문학을 결연히 언어의 문제로 환원시킨 최초의 작가로 플로베르를 누보로망의 원류라 평합니다.

    어린시절 과학적 분위기에 자랐으며 옛 노르만의 피를 받은 어머니에게 몽환적, 낭만적 경향을 이어받아 2개의 상반되는 경향은 어려서부터 그의 성격을 형성, 법학 공부를 시작하나 성적 불량으로 중도 폐지하고 문학에 전심했습니다.

    그의 작품으로는 살람보, 부바르와 페퀴셰, 성 앙투안의 유혹, 마담 보바리 등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1821년 12월 12일 프랑스 왕국 루앙에서 태어나서 1880년 5월 8일에 프랑스 크루아세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작가이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