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시대 메디치가문이란 어떤가문이었나요?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어떤 가문이고, 어떤 역할을 한 가문인가요?
르네상스 시대 이 가문의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17세기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가문으로, 1530년부터 1569년까지 피렌체 공작(duca di Firenze)의 지위를 세습하였고, 1569년부터 1737년까지는 토스카나 대공(Granduca di Toscana)의 지위를 세습해 통치하였다.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클레멘스 7세(Clemens VII, 재위 1523-1534)・피우스 4세(Pius IV, 재위 1559-1565)・레오 11세(Leo XI, 재위 1605) 등 4명의 교황을 배출했으며, 수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을 후원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메디치라는 이름은 1230년의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그 이전의 역사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메디치(Medici)'는 이탈리아어에서 '의사'를 뜻하는 '메디코(medico)'의 복수형이므로, 이들의 조상이 의사나 약제사, 염료 상인 등의 직업을 가졌던 데에서 그러한 가문의 명칭이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 시대에는 직물을 염색하는 데 쓰이는 염료가 약재와 함께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메디치 가문에서는 '코시모(Cosimo)'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것도 의사와 약제사의 수호성인인 '성 코스마스(Saints Cosmas)'와 연관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메디치 가문은 13세기 이후 피렌체에서 점차 영향력을 키워갔는데, 1378년에는 살베스트로(Salvestro de' Medici, ?~1388)가 알비치 가문(Albizzi)이 주도하던 과두정부에 맞서서 하층 노동자들과 신흥 상인들이 연합해 일으킨 촘피의 난(Tumulto dei Ciompi)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 시기에 은행업에 진출한 비에리(Vieri di Cambio de' Medici, ?~1388)는 로마 교황청과 연계해서 부를 쌓았다.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 때에 이르러 피렌체를 지배하는 가문으로 세력이 커졌다. 조반니는 메디치 은행(Banco dei Medici)을 설립했으며, 로마와 아비뇽에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대분열 시기에 대립교황 요하네스 23세(Ioannes XXIII, 재위 1410~1415)를 지원해 로마 교황청의 재무관리자가 되었다. 아울러 이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행정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조반니의 아들인 코시모(Cosimo di Giovanni de' Medici, 1389~1464)는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는 1433년 피렌체에서 추방되기도 했으나, 이듬해 알비치 가문을 쫓아내고 피렌체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도시들만이 아니라 런던과 아비뇽 등 유럽의 다른 지역들로도 은행의 지점을 확대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아울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미켈로초(Michelozzo di Bartolomeo Michelozzi), 도나텔로(Donatello) 등을 후원하고, 플라톤 아카데미를 만들어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로 하여금 플라톤 전집을 라틴어로 번역하게 해서 학문과 예술의 발달에도 기여했다. 그의 아들인 피에로(Piero di Cosimo de' Medici, 1416~1469)도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도나텔로,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등의 예술가를 후원하고, 수많은 책들을 수집하고 보급해 문예 부흥에 영향을 끼쳤다.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Lorenzo de' Medici, 1449~1492) 때에 이르러 메디치 가문은 황금기를 맞이했다. 그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이탈리아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같은 예술가를 후원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피에로(Piero di Lorenzo de' Medici, 1471~1503)는 1494년 샤를 8세가 이끈 프랑스군이 침공해왔을 때에 무능하게 대처해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 메디치 은행도 파산하면서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크게 쇠퇴하였다. 그러나 1512년 교황 율리우스 2세(Iulius II, 재위 1503-1513)가 신성로마제국・아라곤왕국・베네치아공화국 등과 신성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자, 피에로의 동생인 조반니(Giovanni di Lorenzo de' Medici, 1475~1521)는 교황군을 이끌고 피렌체를 장악해 지배권을 다시 되찾았다. 이듬해에 조반니는 율리우스 2세의 뒤를 이어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고, 그의 사촌동생인 줄리오(Giulio di Giuliano de' Medici, 1478~1534)도 교황(클레멘스 7세)이 되면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만이 아니라 교황령으로도 지배권을 넓혔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 등과 동맹을 맺어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에 맞서다가, 1527년 로마가 함락되면서 붙잡혀 유폐되었다. 이때 메디치 가문도 피렌체에서 추방되었으나, 클레멘스 7세와 화해를 한 카를 5세의 지원을 받아서 1530년 피렌체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클레멘스 7세는 공화국 정부를 무너뜨리고 피렌체를 세습군주제의 공국으로 바꾸었고, 피에로(Piero di Lorenzo)의 손자인 알레산드로(Alessandro de' Medici, 1510~1537)를 초대 피렌체 공작으로 삼았다.
그러나 알레산드로는 1537년 먼 친척인 로렌치노(Lorenzino de' Medici, 1514~1548)에게 살해되었고, 방계의 친족인 코시모 1세(Cosimo I de' Medici, 1519~1574)가 피렌체 공작의 지위를 이었다. 그는 1569년 시에나를 합병해서 세워진 토스카나 대공국(Granducato di Toscana)의 초대 대공이 되었다. 하지만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경제적 중심지가 옮겨간 것과 맞물려서 유럽에서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토스카나 대공국도 프란체스코 1세(Francesco I de' Medici, 1541~1587) 이후 쇠퇴하였다. 그리고 제7대 토스카나 대공인 잔 가스토네(Gian Gastone de' Medici, 1671~1737)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은 뒤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1세(Franz I, 1708~1765)가 토스카나 대공의 지위도 겸하게 되면서, 메디치 가문은 대공 가문의 지위를 잃었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본가의 경우에는 남계(男系) 혈통이 끊겼으나, 분가인 오타이아노 메디치 가문(Medici di Ottajano)은 오늘날에도 대가 이어지고 있다.
출 처 :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2542&cid=40942&categoryId=33440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메디치가(이탈리아어: Medici)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던 가문이다. 메디치가는 네 명의 교황(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비오 4세, 레오 11세)과 피렌체의 통치자를 배출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위대한 로렌초는 르네상스 예술의 후원자로 가장 유명하다. 나중에는 혼인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왕실의 일원까지 되었다.
다른 귀족 가문들처럼 그들도 피렌체 정부를 지배하였다. 메디치 가문은 자신들의 권력 아래 피렌체를 두었으며, 예술과 인문주의가 융성한 환경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밀라노의 비스콘티와 스포르차, 페라라의 에스테, 만토바의 곤차가 등 다른 위대한 귀족 가문과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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