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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6.28

메디치 가문에서 어떻게 교황이 탄생한 건가요?

메디치 가문은 예술계에 후원한 가문으로 유명한건 알고 있는데 메디치 가문에서 교황도 나왔더라구요.

메디치 가문에서 교황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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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메디치가는 1512년 피렌체로 복귀하여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를 배출하였다. 독일의 황제 카를 5세가 남하(南下)했을 때(로마의 약탈), 잠시 피렌체를 쫓겨난 메디치가는 얼마 후 황제의 힘을 빌려 복귀하였으며, 가문을 이은 먼 친척인 코시모 1세(1569~1574)가 1569년 토스카나 대공(大公)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1541~1587)는 과중한 세금을 거둬들여 경제를 거의 파탄지경에 몰고 갔으나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로서는 존경을 받을 만하다. 그의 딸 마리아 데 메디치는 프랑스왕 앙리 4세의 왕비가 되어 역사상 ꡐ마리 드 메디시스ꡑ로 알려져 있다. 메디치가는 그 후 유럽의 군주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 후 차차 세력이 쇠퇴하여 1737년 7대째의 대공(大公) 잔 가스토네의 죽음으로 가계가 단절되었다.

    그리고 메디치가에서 프랑스 왕비며 교황도 배출하였음
    이 가문은 로렌초 디 메디치란 인물때 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로렌초는 메디치은행을 근거로하여 각 군주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역할을 하고 스페인이나 프랑스 등 열강들로부터 이탈리아를 지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당시 메디치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면 전쟁을 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돈이 많은 가문이었죠. 그리고 공화국인 피렌체에 메디치가 족벌체제를 굳혀 사실상 군주제로 이행합니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 로렌초 일 마니피코(위대한 로렌초)란 칭호를 받게됩니다. 그러나 로렌초 사후,피렌체의 수도사인 사보나롤라의 선동으로 메디치가문은 피렌체공화국에서 추방됩니다. 그리고 수십년 후, 로렌초의 차남인 조반니가 교황 레오10세가 되자 외국군대의 힘을 빌어 피렌체에 다시 메디치가문 족벌체제를 정립하고 레오10세의 조카손자뻘 되는 코시모 디 메디치는 공화정을 붕괴시키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창건해 군주국가를 세웁니다 15세기 초부터 메디치가(家)가 시정(市政)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는데, 코지모 및 손자인 대(大)로렌츠는 실질적으로 메디치가의 독재체제를 확립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서 그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15세기 말부터 메디치가의 추방과 복귀가 되풀이되었으나, 1532년 메디치가의 세습체제가 확립되어 피렌체는 토스카나 공국(公國)의 수도가 되었다.
    피렌체뿐 아니라 이탈리아전역에 이름을 떨쳤고 프랑스에도 그 집안의 딸을 왕비로 보낸 왕가와 맞먹는 유서깊은 집안이다.그러나 이 유명한 가문이 대대로 유서깊은 귀족이 아니라 일계 평민-그것도 농민에서 환전상-지금으로 말하면 은행가-로 시작한 평범한 가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않다. 그러니 이 집안이 유명하게 된 것은 허울좋은 혈통이나 전쟁에서의 무공이 아니라 돈때문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결말이다.

    차츰 금융업의 지점망을 늘려가면서 프랑스 왕에게까지 대부를 해주고 그들은 부와 명성을 축적하고 서서히 피렌체의 정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피렌체는 몇몇 유력가문의 지배하에 이었지만 가장 늦은 출발을 한 메디치가는 민중을 조종하며 건축과 예술을 자신들의 매스미디어로 이용하면서 권모술수와 실력으로 피렌체의 정권을 잡았다.

    코시모메디치나 로렌초메디치는 상당히 영리한 사람들이었던 것같다.
    조국의 아버지란 칭호를 부여받고서도 코시모는 최고시민의 영예를 놓지않았다.메디치가가 왕가도 아니고 유서깊은 대귀족도 아니었으면서 상당히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한 것은 이와같은 처세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위대한 건축물과 예술품을 남기면서 그들의 독재정치를 미화해갔다.권력가나 왕조가 역사에서 소리도 없이 사라져가지만 메디치가는 그들이 남긴 문화적인 유산으로 세계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그러나 그들의 후손들은 선조들처럼 영리하지못했다. 그들은 추방되었다가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왔지만 서서히 몰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르네상스의 시대에 황금만능주의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고 시민으로서의 최대한 처세술과 용인술을 펼쳤다.르네상스의 후견인 역할을 완벽하게 해 낸 메디치가 사람들의 행적을 보면 과연 "부자는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하는 물음에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코시모 1세는 그리스 학자들의 강의와 플라톤의 숭배자가 되어 자신의 별장에 옛날 플라톤이 세웠던 아카데미를 되살렸다. 피렌체 대학은 지난 700년간 서구 세계에 전혀 알려진 적이 없는 그리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성 베드로 성당의 라파엘 방에 '아테네 학파'의 그림이 그려진 이유이다. 이런 일들은 코시모가 인문주의 운동(르네상스)의 주도자가 되었다. 오스만제국 술탄 메흐메드 2세의 허가를 받아 동방에도 사람들을 보냈어, 이들이 수집한 문헌들은 다른 어떤 도서관도 필적할 수 없는 훌륭한 '로렌초 도서관(손자의 이름)'의 핵심이 되었다. 플로렌스의 궁전과 유적은 이 가문이 만든 것이 많다.미켈란젤로가 로렌초의 총애를 받아 이 가문을 통하여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1534년 이 가문을 떠나 로마로 갔다. 그의 가문에는 2명의 교황도 나왔는데 레오 10세(1513-21)와 클레멘스(클레멘트)7세 (1523-34)이다. 이 가문은 은행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피렌체가 우리와 첫 인연은 임진왜란(1592년) 때 납치해 간 한국인을 일본 나가사키의 노예 시장에서 매매하였다고 한다. 이때 피렌체의 상인 카르레티가 한국소년 다섯 명을 헐값으로 사 인도의 포르투갈 식민도시인 고아로 데리고 갔다.
    이 중에 한 명만 피렌체로 데려갔는데 이 아이가 서양 꼬레아성(姓)의 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이태리 시칠리 섬 지역에

    코레오네 시는 이사람들의고향입니다 이 시장과 시의원들이 이사진을 들고 1988년 서울에 와서 할아버지를 찾겠다고 정부에 청원을 넣어 우리나라 문화재청장이 현지 직접방문하기도한 일이 있습니다 이들 후손이 유명한 시칠리 콜레오네 (코리아나란 이태리 말)가문입니다. 이그림은 피터 루벤스라는 제델라늗화가가 1680년경 그린 그림입니다 제목은 Th Kore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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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시는바와같이 문화예술쪽에 많은 후원을 했는데, 그의 일환으로 돔, 대성당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작업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지요... 그러한 이유가 매디치 가문에서 후일 교황이 탄생하게된 배경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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