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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까칠한호저17223.06.06

홍건적은 어째서 고려를 침공한 것인가요?

홍건적은 고려를 침공했다가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물러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건적은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한족 반란군이라고 하던데 왜 고려를 침공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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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홍건적이 고려를 침공한 이유는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1. 홍건적의 세력 확장: 홍건적은 본래 원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민중적인 반란운동이었지만, 그의 세력이 점점 성장하면서 새로운 영토 확보의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고려는 그러한 확장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2. 원나라의 압력: 원나라는 홍건적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면서 그를 동북아시아의 외곽지역으로 밀어내려 했습니다. 그 결과, 홍건적은 더 안정적인 기반을 찾기 위해 고려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3. 고려의 내부적 약점: 당시 고려는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고위 공신들의 불만과 내란, 그리고 농민들의 불만 등으로 인해 고려는 약해져 있었고, 홍건적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고려를 공격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홍건적이 고려를 침공한 이유는 그의 세력 확장 욕구, 원나라의 압력, 그리고 고려의 내부적인 약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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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동맹국이었으므로 홍건적 입장에서는 고려는 원나라 편으로 보았습니다.

    모거경이 이끄는 홍건적들은 원나라의 공격에 수세게 몰리게 되자 만만한 고려를 침공해 향후 원나라와 싸우기 위해 근거지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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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6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55년(공민왕 4) 국호를 송(宋)이라 정하고 허난성(河南省)·산시성(山西省)·산시성(陜西省) 등지로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그 일부가 만주(滿洲) 지역으로 북진해 요동(遼東)을 점령했다가 원의 반격에 쫓기게 되자 고려를 침범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이미 1354년에 원의 요청에 따라 군사 2,000명을 원에 파견한 적이 있습니다. 1357년에는 김득배(金得培)를 서북면홍두군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軍倭賊防禦都指揮使)로 삼아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1359년 12월 모거경(毛居敬)이 4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와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가 함락되었습니다. 또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암(李嵒)을 서북면도원수로, 경천흥(慶千興)을 부원수로, 김득배를 도지휘사로 삼아 침입을 막으려 했으나 철주(鐵州)와 서경(西京 : 平壤)이 계속해서 함락되었습니다.


    이에 이암 대신 이승경(李承慶)을 도원수로 삼고, 다음 해 1월에 2만 명의 군사를 보내 서경을 탈환하였습니다. 또 2월에는 정주·함종(咸從)·안주(安州 : 載寧)·철주 등지에서 이들을 섬멸해 모두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내었습니다.


    이 후 홍건적은 해로를 이용해 풍주(豊州)·봉주(鳳州)·안악(安岳)·황주(黃州)·안주 등 해안 지방에서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다가 1361년 10월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 등이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범하였습니다. 삭주(朔州)·이성(泥城)·무주(撫州 : 寧邊)·안주가 함락되고, 흥의역(興義驛 : 牛峰)에 이르러 개경(開京)을 위협하였습니다.


    이에 공민왕은 광주(廣州)를 거쳐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파천(播遷)하고 개경은 함락되었습니다. 그 해 12월에 고려는 복주에서 군사를 정비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습니다.


    또한 각 도에서 20만 명의 군사를 소집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를 상원수로,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를 도병마사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정휘(鄭暉)를 동북면도지휘사로 삼아 개경을 탈환하도록 하였습니다.


    다음 해 1월에 고려군은 개경에 진격해 적을 대파하고 관선생·사유 등을 잡아죽였습니다. 이에 적은 압록강을 건너 모두 퇴각하였습니다. 이 후에도 좌정승(左政丞) 유탁(柳濯)을 서북면홍적방어제군도통사(西北面紅賊防禦諸軍都統使)로, 밀직사 이순(李珣)을 도병마사로, 김한귀(金漢貴) 등 12명을 제도병마사로 삼아 재침에 대비했으나, 대대적인 침범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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