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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4.21

고종이 궁안에 건천궁을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종이 궁안에 건천궁을 지은 이유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고종이 경복궁안에 왕과 왕비만을 위한 공간으로 건천궁을 만들었다고 하는 소리도 있고,

ChatGPT를 통해 검색해보니까

(당시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억누르기 위한 군사력 강화와 국가형편의 개선을 위해

궁중에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여 국왕의 궁중생활과 업무를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건천궁은 건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의 식민지 침략과 경제적 억압 등에 맞닥뜨려

결국 사용되지 못한 채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라고 하던데 무엇이 맞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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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1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건청궁은 외교관 접대의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경복궁 중건이 끝난 지 한 해 뒤인 1873년(고종 10)에 궁궐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자리에 창건되었다. 고종은 정부 대신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비밀리에 내탕금으로 건청궁을 짓다 공사 도중 문제가 되어 중지할 것을 요청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사가 강행되어 여러 건물이 지어졌으며, 그 뒤 국왕과 왕비의 거처로 이용되거나 외교관 접대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때 건청궁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어 한국 근세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경복궁 안에 있던 수많은 건물을 파괴되기 시작한 1909년에 건청궁도 함께 헐렸다. 광복 후인 1945년 11월 이 자리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워졌고, 그 동쪽에 3단으로 기단을 쌓아 ‘明成皇后遭難之地(명성왕후조난지지)’라고 새긴 표석을 세워 놓았다.

    건청궁 창건 당시의 원형은 「북궐도형(北闕圖型)」과 『궁궐지(宮闕志)』 등을 통해 전체의 구성, 규모 등은 알 수 있으며 2007년 건청궁의 복원이 이루어져 건청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 전체의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장안당(長安堂)·곤녕합·복수당(福綏堂)으로 이루어진 구역이 162.5칸, 장안당 서쪽에 있는 각감청(閣監廳) 60칸, 남쪽에 있는 연못과 그 가운데에 만들어진 섬과 향원정(香遠亭), 섬과 건청궁을 잇는 취향교(醉香橋)로 이루어진 궁궐 안 후원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복궁 건청궁 [景福宮乾淸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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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복궁 내 건청궁 곤녕합과 천추전은 조선의 26대 국왕인 고종과 명성황후의 역사를 간직한 건물로 그 의미가 깊다고 합니다. 건청궁은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직접 국가경영을 시작하기 위해 경복궁 북쪽에 지은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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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건청궁은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직접 국가경영을 시작하기 위해 경복궁 북쪽에 지은 건물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끔직한 왕비 시해라는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건청궁(乾淸宮)은 ‘하늘이 맑다’는 의미의 집입니다. 장안당(長安堂), 곤녕합(坤寧閤), 복수당(福綏堂) 등이 건청궁 영역 안에 일곽을 이루고 있는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에 경복궁 북쪽 끝자락에 지은 집으로 건청궁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궁궐 안에 또 하나의 궁이 있는 셈입니다.

    건청궁을 지을 무렵 고종이 생부 흥선 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할 것을 표명한 의지는 비장했다고 합니다 재위 10년이 된 청년 군주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근거지였으나 건청궁을 짓고 그곳에 살던 왕실에 닥친 비극은 조선왕조가 역사의 내리막길로 치닫는 시작을 알리는 처참한 현장이었습니다. 옥호루의 동쪽 면에 있는 사시향루(四時香樓) 현판은 장안당의 추수부용루와 짝을 이루는 이름이다. 그 이름에서 여성적인 분위기가 한껏 느껴지는 ‘사시향(四時香)’은 네 계절 끊이지 않고 꽃향기가 풍긴다는 뜻입니다. 마치 이곳에 머물던 주인, 명성황후를 그려낸 듯한 이름이다. 옥호루 누각을 통해 담장 너머 그린 듯 아름다운 향원정이 보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는 45세의 짧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건청궁은 1985년 을미사변 후 주인을 잃고 1909년경 일제에 의해 완전히 헐려서 없어졌다가 98년 만에 관문각을 제외한 일대가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한이 깃든 장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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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종식하고 친정을 선언하는데 이때문에 건청궁 건립은 고종이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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