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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한할미새139
기특한할미새13923.12.21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생애는 어떻게 될까요?

제가 학창시절에 세계명작 중의 하나인 젊은베르테르의 슬픔을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젊은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작가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로 알고 있는데 괴테의 생애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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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일 태생인 괴테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1749년 8월 28일 12시 정각에 태어났다고합니다. 괴테는 방이 20개나 되는 대저택에서 유년시절과 청년 초기를 유복하게 보냈으며 아버지는 엄격한 법률가였고 어머니는 따뜻하고 지혜로운 분이셨으며 형제는 많았지만 대부분 어릴 적 병사하고 여동생 한 명만 살아남았다고합니다. 여동생과 괴테는 엄청 친밀했으며, 괴테의 연애들을 질투해서 방해하기도 했다는 설이 있을정도였다고합니다. 그녀는 괴테의 절친과 결혼했으나 26살에 산후열로 병사를 하고 말았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25살 때 이 집에서 한 달간 집필되었다고 합니다. 괴테는 아침 루틴이 있었는데 새벽 5시 반에 기상해서 점심때까지 7~8시간 동안 글을 썼다고 하며 괴테는 사랑에 빠질때마다 새로운 감성과 생명력으로 대작이 나왔다고합니다. 이 책의 명성으로 이 후에 바이바르 공국의 재상으로 초대되면서 그 당시 인구 6000명이 살고 있었던 바이마르에서 살게 되었고 처음에는 아름다운 일름공원 안에 있는 작은 오두막 집에서 공무와 집필생활을 하면서 6년 정도 이 집에서 살다 도망치듯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고합니다. 이 여행은 괴테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성당 등을 다니면서 수많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이탈리아에서의 경험들은 괴테의 작품에 고전주의를 비롯하여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합니다. 문학적 성장을 이루게 해 준 계기가 되었으며, 한 인간으로서 괴테의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고 1788년에 바이마르에 돌아온 40살의 괴테는 가난한 집안의 딸 크리스티아네를 만나 무려 18년 동안 동거하다가 결혼하여 아들도 낳고 평범한 결혼생활을 하였으나 정식으로 결혼한지 6년 후에 부인이 병사합니다. 괴테의 대표적인 작품인 파우스트는 죽기 직전 해까지 60여년에 걸쳐 수정과 편집을 해서 완성한 작품으로써 파우스트는 1773년 대학시절 때 초고 집필을 시작하여 1832년 괴테가 죽기 직전 해에 걸쳐 60년 동안 집필을 한 대작이며 그의 인생의 다양한 체험, 고뇌, 사랑, 관찰, 지혜 등이 담긴 독보적인 작품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괴테는 향년 82살에 독감이 와서 폐렴과 신부전으로 이어져 파우스트의 집필을 마친지 1년 후에 사망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출생으로 고전주의의 대표자로 세계적인 문학가이며 자연연구가이고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 활약했습니다.

    아버지는 법률가이며 제실고문관으로서 엄격한 성격이었으며, 시장의 딸인 어머니는 명랑하고 상냥해 아들의 좋은 이해자였습니다. 7년 전쟁때 프랑스에 점령되어 부유했던 그의 집도 프랑스 민정장관의 숙사가 되고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계획 역시 중단되나 괴테는 자유롭게 프랑스의 문화에 접할 기회를 얻었으며 15세때 그렌트헨과 첫사랑을 경험합니다.

    1765년 라이프치히대학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내다 1768년 각혈해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했으며 그 무렵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고, 어머니의 친구인 크레텐베르크의 감화로 경건파의 신앙에 접근합니다. 그녀는 후일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 의 모델이 되었으며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머무르면서 J.G헤르더를 알게 되어 종래의 로코코 취미의 문학관은 철저히 분쇄핟앟고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 감정의 순수성에 시의 본질을 구하려는 노력이 들장미의 가작을 낳게 합니다.

    이 무렵 근처 마을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목가적인 사랑을 했으며 약혼까지 하나 결국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 그 후 회한과 마음의 부담 속에 우울한 날을 보내는데 이 때 겪은 내적 체험이 훗날 그의 시의 주제가 됩니다. 1771년 변호사가 되어 고향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였고,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습니다. 이 때 샬로테 부프와의 비련을 겪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는데 이 작품으로 일약 문단에서 이름을 떨쳤고 독일적 개성해방의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의 중심인물로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했습니다.

    1775년 바이마르 공국의 젊은 대공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을 받고 바이마르로 가 여러 공직에 앉게 되고 재상이 되어 10년 남짓 국정에 참여, 이 동안 그는 정치적으로 치적을 쌓는 한편, 지질학 , 광물학을 비롯해 자연과학 연구에 몰두합니다.

    1784년 동물에만 있고 인간에게 없는 것으로 되어 있던 간악골을 발견해 비교해부학의 선구자가 되며 이 무렵 괴테는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 12년에 걸친 연애를 하여 부인으로부터 인간적 및 예술적 완성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1786년 이탈리아 여행을 떠남으로 부인과의 애정관계가 끝이 납니다.

    이탈리아에서 수업하는 화가로서의 생활을 보내면서 1000매에 이르는 스케치를 그렸으며 희곡 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 에흐몬트 등을 써 슈타인 부인에게 바쳤으며 이 여행은 예술가로서의 괴테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며 고전주의에의 지향을 결정한 시기로서 중요합니다.

    1788년 바이마르에 돌아온 그는 조화업을 하는 가난한 집 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동거하면서 비로소 가정적인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시인과 궁정인의 갈등을 그린 희곡 타소와 관능의 기쁨을 노래한 로마 애가 를 발표, 과학논문 식물변태론도 이 시기의 산물이며, 1791년 궁정극장의 감독이 되며 그때부터 고전주의 연극활동이 시작됩니다.

    1789년 이후의 프랑스 혁명의 격동은 바이마르 공국도 휩쓸게 되어 1792년 그는 아우구스트 대공을 따라 프랑스로 종군, 1794년부터 그는 J.C.F.von 실러가 기획한 잡지 호렌 에 협력하여 굳은 우정을 맺었으며 이념의 사람 실러와 실재의 사람 괴테와의 이 우정은 1805년 실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10년 남짓한 시기 그는 실러의 깊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합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의 재착수,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시절의 완성,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 의 발표 등 현재에서의 완성을 지향하는 독일 고전주의는 여기서 확립됩니다.

    1979년 실러의 시신연감에 공동작의 단시 쿠세니엔 414편을 발표해 문단을 풎아, 문단의 물의를 외면한 채 이야기체로 쓴 시를 경작해 1797년 발라드의 해라 일컬어집니다. 1805년 실러의 죽음과 더불어 괴테는 만년기를 맞이합니다. 만년의 괴테의 문학활동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세계문학의 제창과 그 실천으로 , 그는 그 무렵 이미 유럽 문학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위치에서 프랑스, 이탈이아, 영국, 나아가 신대륙인 미국의 문학을 조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각 국민문학의 교류를 꾀하고, 젊은 세대를 위한 세계문학적 시야를 넓히게 됩니다.

    만년의 문학작품으로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파우스트의 완성이 최고봉을 이루며 전자는 당시의 시대와 사회를 묘사한 걸작, 후자는 한 인간의 생애가 전인류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엄한 드라마 입니다. 파우스트는 23세때부터 쓰기 시작해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31년 완성된 생애의 대작으로 세계문학 최대 걸작의 하나이며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가였던 괴테는 만년에도 세 차례의 연애를 체험합니다.

    그 하나는 미나 헤르츨리프와의 사랑으로, 이 소녀를 모델로 해 소설 친화력을 쓰며 , 또 하나는 아내 불피우스가 죽은 후 알게 된 빌레머 부인과의 사랑으로 그녀를 사모하여 읊은 서동시집이 간행, 마지막으로 괴테는 마리엔바더로 피서여행을 갔다가 74세의 노령으로 19세의 처녀 우를리케 폰 레초베를 사랑하게 되는데 , 이 사랑은 거절되나 그 연모의 정이 시집 마리엔바더의 비가에 나타납니다.

    그 밖에 만년의 작품으로 이탈리아 기행, 자서전인 시와 진실 등이 있습니다.

    그의 광학 연구의 결정인 색채론이 1810년 발표되는데 여기에는 뉴턴의 이론에 대한 잘못된 비판들이 있어 순학문적인 견지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나 탁월한 관찰과 견해가 많이 보입니다.

    그는 문학작품이나 자연연구에 있어 신과 세계를 하나로 보는 범신론적 세계관을 전개, 그의 종교관은 범신론적 경향이 뚜렷하나 복음서의 윤리에는 깊은 존경을 표시합니다.

    그의 유해는 바이마르 대공가의 묘지에 대공 및 실러와 나란히 안치되어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출생.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로서 세계적인 문학가이며 자연연구가이고, 바이마르 공국(公國)의 재상으로도 활약하였다. 아버지는 법률가이며 제실고문관(帝室顧問官)으로서 엄격한 성격이었으며, 시장(市長)의 딸인 어머니는 명랑하고 상냥하여 아들의 좋은 이해자였다. 7년전쟁(1756∼1763) 때에는 프랑스에 점령되어 평화롭고 부유했던 괴테의 집도 프랑스 민정장관(民政長官)의 숙사(宿舍)가 되고,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계획 역시 중단되었으나, 괴테는 자유롭게 프랑스의 문화에 접할 기회를 얻었으며, 15세 때 그레트헨과의 첫사랑을 경험하였다.

    1765년에 라이프치히대학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내다가, 1768년 각혈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생활을 하였다. 그 무렵에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鍊金術)에 관심을 갖게 되고, 어머니의 친구인 크레텐베르크의 감화로 경건파(敬虔派)의 신앙에 접근하였다. 그녀는 후일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의 모델이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머무르면서 J.G.헤르더를 알게 되어 종래의 로코코 취미의 문학관은 철저히 분쇄당하고,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 감정의 순수성에 시의 본질을 구하려는 노력이 《들장미》의 가작(佳作)을 낳게 하였다.

    이 무렵 근처 마을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목가적(牧歌的)인 사랑을 하였고 약혼까지 하였으나, 결국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하였다. 그 후 회한(悔恨)과 마음의 부담 속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이 때 겪은 내적 체험이 훗날 그의 시의 주제가 되었다. 1771년 변호사가 되어 고향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였고, 1772년에는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 때 샬로테 부프와의 비련(悲戀)을 겪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1774)을 썼는데, 이 작품으로 일약 문단에서 이름을 떨쳤고, 독일적 개성해방(個性解放)의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질풍노도)’의 중심인물로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1775년에 바이마르 공국의 젊은 대공(大公)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을 받고 바이마르로 가서 여러 공직에 앉게 되고 재상이 되어 10년 남짓 국정(國政)에 참여하였다. 이 동안 그는 정치적으로 치적(治積)을 쌓는 한편, 지질학 ·광물학을 비롯하여 자연과학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1784년, 동물에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는 것으로 되어 있던 간악골(間顎骨)을 발견하여(죽기 1년 전에 학회에서 인정되었음) 비교해부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무렵 괴테는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 12년에 걸친 연애를 하여, 부인으로부터 인간적 및 예술적 완성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1786년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남으로써 부인과의 애정관계는 끝을 맺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수업하는 화가로서의 생활을 보내면서 1,000매에 이르는 스케치를 그렸으며, 희곡 《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 Iphigenie auf Tauris》(1787) 《에흐몬트 Egmont》(1787) 등을 써서 슈타인 부인에게 바쳤다. 이 여행은 예술가로서의 괴테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고전주의에의 지향(志向)을 결정한 시기로서 중요하다.

    1788년에 바이마르에 돌아온 괴테는 조화업(造花業)을 하는 가난한 집안의 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동거하면서(정식 결혼은 l806년), 비로소 가정적인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 무렵에 그는 시인과 궁정인의 갈등을 그린 희곡 《타소 Torquato Tasso》(1789)와, 관능의 기쁨을 노래한 《로마 애가(哀歌)》(1790)를 발표하였다. 과학논문 《식물변태론(植物變態論)》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1791년에는 궁정극장의 감독이 되었으며, 그 때부터 고전주의 연극활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1789년 이후의 프랑스 혁명의 격동은 바이마르 공국도 휩쓸게 되어, 1792년에 괴테는 아우구스트 대공을 따라 프랑스로 종군하였다. 1794년부터 그는 J.C.F.von 실러가 기획한 잡지 《호렌 Horen》에 협력하여 굳은 우정을 맺었다. 이념의 사람 실러와 실재(實在:자연)의 사람 괴테와의 이 우정은 l805년에 실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10년 남짓한 시기에 괴테는 실러의 깊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하였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 Faust》의 재착수,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徒弟) 시절 Wilhelm Meisters Lehrjahre》(1796)의 완성,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 Hermann und Dorothea》(1797)의 발표 등, ‘현재에서의 완성을 지향하는’ 독일 고전주의는 여기서 확립되었다.

    1797년에는 실러의 《시신연감(詩神年鑑)》에 공동작의 단시(短詩) 《쿠세니엔(손님에게 드리는 선물)》 414편을 발표하여 문단을 풍자하였다. 또한 문단의 물의(物議)를 외면한 채 이야기체로 쓴 시(詩)를 경작(競作)하여, 1797년은 ‘발라드의 해’라고 일컬어진다. 1805년 실러의 죽음과 더불어 괴테는 만년기(晩年期)를 맞이하였다. 만년의 괴테의 문학활동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세계문학’의 제창(提唱)과 그 실천이었다. 괴테는 그 무렵에 이미 유럽 문학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위치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나아가서 신대륙인 미국의 문학을 조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각 국민문학의 교류를 꾀하고, 젊은 세대를 위한 세계문학적 시야를 넓혔던 것이다.

    만년의 문학작품으로서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Wilhelm Meisters Wanderjahre》(1829)와 《파우스트》의 완성이 최고봉을 이룬다. 전자(前者)는 당시의 시대와 사회를 묘사한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후자(後者)는 한 인간의 생애가 전인류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엄한 드라마이다. 《파우스트》는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야 완성된 생애의 대작이며, 세계문학 최대걸작의 하나이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가였던 괴테는 만년에도 세 차례의 연애를 체험하였다.

    그 하나는 미나 헤르츨리프와의 사랑으로서, 이 소녀를 모델로 하여 소설 《친화력 Die Wahlverwandtschaften》(1809)을 썼다. 또 하나는 아내 불피우스가 죽은 뒤에 알게 된 빌레머 부인과의 사랑으로, 그녀를 사모하여 읊은 《서동시집(西東詩集) Westöstlicher Divan》(19)이 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괴테는 마리엔바더로 피서여행을 갔다가 74세의 노령으로 19세의 처녀 우를리케 폰 레베초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사랑은 거절되었으나, 그 연모의 정이 시집 《마리엔바더의 비가》(1823)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밖에 만년의 작품으로 《이탈리아 기행 Italienische Reise》(1829)과 자서전인 《시와 진실 Dichtung und Wahrheit》(1833) 등이 있다.

    또한 그의 광학(光學) 연구의 결정인 《색채론 Zur Farbenlehre》이 1810년에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뉴턴의 이론에 대한 잘못된 비판이 들어 있어 순학문적인 견지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나, 탁월한 관찰과 견해가 많이 보이고 있다. 괴테는 문학작품이나 자연연구에 있어서, 신(神)과 세계를 하나로 보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세계관을 전개하였으며, 그의 종교관은 범신론적 경향이 뚜렷하지만, 복음서의 윤리에는 깊은 존경을 표시하였다. 그의 유해는 바이마르 대공가(大公家)의 묘지에 대공 및 실러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