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완성자나 조선의 체호프라고 칭해지는 이태준의 생애와 작품 경향에 대해 궁금합니다.
이태준은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완성자'나 '조선의 체호프'라고 칭해질 만큼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리고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이라는 평가도 있고요.
일제가 패망하고 건국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마주친 이태준은 이전 문학경향과는 달리 현실참여로 자세를 전환한 것도 알고 있지만, 작품 세계로 이태준을 탐구하고 싶네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태준은 말씀하신대로 조선의 체호프라고 불리며 우리나라 단편소설계의 완성자라고 불리운다고 합니다. 이태준의 작품은 대부분 짧은 단편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삶과 사랑 혹은 죽음을 주제로 깊은 사유를 불러 일으키는데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일제강점기 시절 [오몽녀] [아무일도 없소] [돌다리] 등을 저술했었습니다.
이태준은 당시 시대상을 호소하고 담았던 문학가들과 달리 현실참여에 반대하는 순수문학 단체 '구인회'를 만들었을 정도로 순수문학파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후에 [해방전후] 같은 일제강점기와 현실의 고통을 비교하는 작품등을 쓰며 조금 현실참여적인 성향으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태준의 작품은 간결하면서 호소력있는 묘사적 문장력이 뛰어났으며 그의 작품에 묘사되는 인물들은 비극적 사태속에서도 인간미가 풍겼으며 인간애를 촉구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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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예지 『문장(文章)』(1939.2∼1941.4.)을 주재하여 문제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역량 있는 신인들을 발굴하여 문단에 크게 기여하였다.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1925)를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또, 「아무일도 없소」(東光, 1931.7.)·「불우선생(不遇先生)」(三千里, 1932.4.)·「꽃나무는 심어놓고」(新東亞, 1933.3.)·「달밤」(中央, 1933.11.)·「손거부(孫巨富)」(新東亞, 1935.11.)·「가마귀」(朝光, 1936.1.)·「복덕방(福德房)」(朝光, 1937.3.)·「패강냉(浿江冷)」(三千里文學, 1938.1.)·「농군(農軍)」(文章, 1939.7.)·「밤길」(文章, 1940·5·6·7합병호)·「무연(無緣)」(春秋, 1942.6.)·「돌다리」(國民文學, 1943.1.) 등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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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교양적 삶과 문화주의
1. 고아의식과 현실인식
이태준(1904-, 李泰俊)은 고아로 자랐다. 이태준의 문학하기의 직접적인 동기는 자아 극복과 자아 성취였다. 자아 극복은 고아의식과 서얼의식의 극복이었고, 자아 성취는 권력과 경제 즉 사회적 출세였다.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말하자면 이태준의 문학하기였다. 이태준은 이광수와 같은 점이 많았다. 문학하기의 동기 또한 비슷했다. 이광수도 고아였고, 이태준도 고아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고아 체험으로부터 시작한다. 고아는 남달리 자아 성취욕이 강하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정상인들 보다 몇배 높다고 한다. 이들은 사실은 명예욕보다 권력욕이나 경제 욕에 대한 성취 욕구가 더 컸다.
이태준과 이광수의 일차 인생의 목표는 사회의 세속적 출세이었다. 그 증에서도 권력과 경제력에 대한 욕구가 제일 강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것을 할 수가 없었다. 이광수나 이태준이 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글쟁이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이들은 권좌의 꿈을 일생동안 버리지 못했다. 이광수가 자기는 문사가 아니라 대학자요, 민족의 지도자임을 자처한 것처럼 이태준 역시 사회 지도자임을 자처했고, 옛 선비 연 했을 뿐만 아니라 문단 지도자로 군림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이 되자마자 좌익 문단에 가담하여 지도부 임원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이들의 문학 해위는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들이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역시 권력과 돈이었다. 이들이 얼른 보기에는 돈과 권력으로부터 초연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의 일제시대의 친일적인 행각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특히 이태준의 일제말기 장편소설의 주인공들은 돈의 욕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들이 권력과 돈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한용운처럼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역시 이태준이였고 이광수였다.
이태준은 서얼 출생일뿐만 아니라 고아이었다. 이태준 문학의 기본 모티브는 고아 체험이었다.1) 이태준은 일생 동안 서얼의식과 고아의식에 시달리며 살았다. 따라서 서얼의식과 고아의식의 극복은 그 자신의 일생일대의 과업이기도 했다. 이태준은 문학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 했다. 그의 장편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태준의 분신이었다.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용담)에서 이문교(李文敎)2)와 그의 소실 순흥 안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태준의 부친은 무엇에 쫓기듯이 가산을 정리하여 가족들을 이끌고 1909년 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사를 갔으나 그해 가을 불길한 소식을 듣고는 졸도한 후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가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한 가족들은 서둘러 귀국했다. 그러나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이태준의 모친이 귀향선 안에서 해산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태준 가족은 외할머니, 어머니, 누이 송옥, 정서방 등이었다. 이들은 심한 파도에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함경도 연안 부두인 배메기(梨津)에 정박했다. 이후 이들은 근처 도시 소청(素淸)으로 가서 음식점을 시작했다. 이때 이태준은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을 배웠다. 1912년 겨울 이태준이 서당에서 돌아와 보니 그의 모친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태준은 유년기에 연거푸 부모를 잃는 불행을 당하였으나 외할머니 덕분에 이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태준에게는 부모의 죽음 보다는 고아로서의 삶이 더 문제시 되었다.
1. 아버지는 하룻날 불붙듯 급한 이상을 품기 만 한 채 밤중 달 걸친 파도소리 고요한 창 밑에서 삼십 오세를 일생으로 한 많은 눈을 감고 말았다.(중략) 그때가 마침 하관하는 때라 허연 관이 여러 사람들의 배 줄에 실려 가라앉듯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2. “주검이란 갑자기 남이 되는 걸까?” 요 아래로 떨어진 어머니 손을 몇 번 움칫거리다가 가만히 만져보았다. 돌처럼 차다. 제 손까지 써늘해짐을 느끼었다. 그러나 울음은 도무지 나오려 하지 않았다.
3. 날이 저물자 원산은 집집마다 전깃불이 켜졌다. 전등이 제일 환한 데를 가보니까 정거장이었다. 거기는 누구나 쉴 수 있는 걸상이 있었다. 배가 고파 잠이 올 것 같지 않더니 깜빡 잠이 들었다. “이 자식아? 어디서 자?”라는 청소부 소리에 놀라 쫓겨나오니 밖에는 언제부터인지 비가 부슬부슬 내리었다. 전등들은 그냥 밝으나 밤은 깊은 듯 괴괴하였다.3)
위 인용문 1은 이태준이 6살 때 목격한 부친의 죽음이며, 2는 그의 나이 9살 때 당한 모친의 죽음이다. 졸지에 고아가 된 이태준은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이후 이들은 철원 용담으로 돌아와 이태준은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오지에 사는 오촌 댁에 입양되어 나무꾼 아이가 되기도 했으나 다시 용담으로 돌아와 봉명학교를 설립한 오촌 이동하 댁에 기거하면서 이 학교를 다니어 졸업했다. 졸업 후 이태준은 집을 나왔다. 이태준은 걸어서 원산에 이르렀다. 인용문 3은 이태준이 겪은 원산에서의 첫날밤의 정경이다. 기차역 삼등 대합실에서 자다가 쫓겨난 이태준은 갈 곳이 없었다. 이태준은 객주 집 호객꾼이 되었다. 이태준은 어린 나이에 많은 사람을 접하게 되면서 세상살이를 차츰 알게 되었다. 외할머니가 원산으로 이태준을 찾아와 빈대떡 장사를 하며 그를 보살펴주었다. 이태준은 미국 유학의 꿈을 안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현까지 갔다가 무일푼이 되어 걸어서 고향 철원으로 돌아왔다. 그간의 걸인 행세는 글자그대로 이태준의 고아 체험 그것이었다. 이태준은 청년기 2년여를 북지에서 걸인 생활을 하며 보냈다. 그의 이 같은 고생살이는 일종의 통과제의였다.
이태준은 1921년 상경하여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 이태준은 고학을 했다. 책장사로 학비를 벌어가며 4년 반 학업을 계속하는 동안 결석이 잦고 학비를 체납하는 일이 많았다. 이태준의 문재는 휘문의숙 재학 때 발탁되었다. 이태준은 교지 <휘문>(1924) 제2호에 <부여행>, <물고기 이야기> 등을 발표하면서 문우들과 어울려 지내게 되었다. 당시 휘문의숙에는 박종화․정지용 등이 재학 중이어서 이태준의 문학 수업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태준이 이 학교를 중퇴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백두진(白斗鎭)과 동맹휴학을 주동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이태준은 졸업을 1학기 앞두고 1924년 6월 퇴학당했다.
이태준은 1925년 봄 도일하였다. 이태준은 도쿄에서 단편소설 <오몽녀>를 써서 그해 7월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입선이 되었다. 이 작품은 이태준의 문단 데뷔작이 되었다. 이로부터 이태준은 작가가 될 결심을 하고 문학수업에 전렴하게 되었다. 이태준은 1926년 4월 상지(上智)대학 문과에 입학해 더욱 문학 수업에 정진하였다. 이태준은 도쿄 체류 기간 중 미국인 뻬닝호프 박사를 통해 자유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접하게 되었지만 사회주의 사상 쪽에 더 기울어 있었다. 신문 배달을 하며 고학을 하던 이태준은 그의 각별한 도움을 받았다.4) 그러나 그는 1년 반 만인 1927년 7월 학업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태준은 1929년 개벽사에 입사하여 창작에 전렴했다. 당시 「개벽」의 편집장은 박영희로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본거지였던 탓도 있었겠지만 이태준은 도쿄 시절에 관심이 컸던 사회주의 운동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태준 스스로가 말하듯이 이태준은 사회에 불평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태준의 사회에 대한 남다른 반항심은 그의 고아의식의 발로였다.5) 1930년 이태준은 이화여전 음악과를 나온 이순옥과 결혼하였다. 이후 이태준은 중외일보 기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이화여전 강사를 역임하는 한편 순수문학 단체인 <구인회>에 가담하였으며, 1939년 2월 「문장」의 편집을 담당하게 되면서는 문단의 중심적 인물이 되었다.
이태준은 일제말기 황군위문작가단, 조선문인협회 등 친일적 문화인 단체에 가담하였고6), 그의 장편소설에는 신체제 순응적 색채가 짙게 반영되었다. 한마디로 이태준은 친일의 늪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태준은 1943년 6월 역사소설 <왕자호동> 연재가 끝나자 절필을 선언하고 고향 용담으로 내려가 해방이 될 때까지 낚시로 소일하였다. 해방이 되자 이태준은 조용만의 증언처럼 “지사적 영웅심 때문에 문단의 헤게모니를 쥐려고 좌익으로 돌아섰다.”7)
이상의 간략한 생애의 서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태준은 남다른 고통의 유년기를 보냈다. 그 중에서도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9살에 어머니를 잃어 천애의 고아가 된 일은 그의 생애에 커다란 갈림길이 되었다. 친척에 입양되어 자라면서 천대와 괄시를 받기도 했고,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그는 걸어서 조선 북지를 떠돌아다니며 걸식을 하며,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이 같은 유년 시절의 고통스러운 불행은 그의 문학적 자원이 되었다.
이태준의 청년기는 고학 체험으로 채워져 있다. 이태준은 서울 생활을 하면서부터 전통 문화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도쿄 유학을 통해서는 근대문화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이태준의 일제말기 장편소설에는 도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여러 편 있다. 이태준은 일본의 근대문화를 동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태준은 책의 고급 장정, 고급 찻집 분위기, 화랑, 서점, 음악, 건축, 극장, 공원, 백화점 등 문화적 분위기와 일본인들의 교양 즉 일본 문화에 매료되어 있었다.8) 한마디로 이태준에게는 도쿄 문화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태준은 대한민국의 소설가로,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불리며 조선의 체호프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은 현실과 상상
력을 융합시킨 독특한 스타일과 다양한 주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태준은 개인의 내면 갈등과 인간의 존재 의미를 중심으로 다루며, 사
회적 약자와 일상 속의 인간 관계, 사회적 문제 등을 다양하게 그려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탈주"와 "한낮의 피크닉"이 있으며,
그의 작품은 현대 한국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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