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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태양새285
탁월한태양새28523.05.19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게 어떤 전쟁인가요?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이고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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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두 나라간의 긴장으로 인해 시작됐습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시절 당시 오랜 라이벌이었는데요. 그리스에는 다른 많은 도시 국가가 있었지만 이 두 국가가 가장 강력한 도시로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대성향이었는데, 스파르타는 전체 사회를 강력한 군대로 발전시키는데 집중하였고, 아테네는 주로 교육, 철학, 경제 건설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후 아테네가 더 많은 권력과 힘이 모이게 되면서 스파르타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두 지역의 힘과 점점 커지는 경쟁은 델리안 리그(페르시아 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짐)로 인한 긴장 고조로 인해 갈등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아테네의 권력은 델리안 동맹의 수장이 되었을 때 매우 커졌고, 스파르타와 다른 많은 도시 국가들을 긴장시켰습니다.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권력에 도전하기 위해 동맹국을 모았을 때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는 아테네의 군사력을 고려할 때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전쟁은 기원전 431-404년에 벌어졌고 전쟁 중반에 휴전도 했었찌만 이후 도시 국가들은 다시 분쟁에 휘말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지만, 전쟁 이후 그리스의 분열고 인해 마케도니아가 쉽게 그리스를 침략하고 정복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델로스동맹을 지배하는 아테네가 횡포를 부려 제시(諸市)의 자치를 범하고 위협하였으며, 또한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번영을 시기하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은 케르키라(코르푸섬)와 코린토스의 싸움에 아테네가 끼어든 데 있었다. 상업무역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던 코린토스는 아테네의 해상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케르키라와 코린토스의 싸움에 아테네가 케르키라의 편을 들어(BC 433) 양자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이 밖에도 메가라 등 아테네에 불만을 품고 있는 도시들이 있었다. 코린토스·메가라 등은 펠로폰네소스 동맹회의를 열고 아테네와의 전쟁을 결의, 스파르타를 부추겨 개전(開戰)하게 하였다.

    전개과정은

    전쟁은 3기(期)로 나눌 수 있다. ① 제1기(BC 431∼BC 421):10년전쟁 또는 아르키다모스전쟁이라고도 한다. ② 제2기(BC 421∼BC 413):휴전기간. ③ 제3기(BC 413∼BC 404):데켈레아전쟁이라고도 한다. 제1기 전쟁을 아르키다모스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가 육군을 거느리고 자주 아테네 원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장군 페리클레스는 농성전술(籠城戰術)을 택하여 최강의 육군을 자랑하는 스파르타와 정면으로 싸우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소모를 피하였다. 그리고 해군으로 펠로폰네소스 해군을 습격하여 스파르타군에 타격을 줌으로써 승리를 획득하려고 하였다. 이 전술은 성공하는 듯하였으나, 개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아테네에 페스트가 유행하여 많은 인명을 빼앗고 페리클레스도 이때 병사(病死)하였다. 화평의 기운은 자주 보였으나 아테네의 지도자가 호전파(好戰派)인 클레온인 점도 있고 하여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클레온의 전사(戰死)로 BC 421년에야 겨우 니키아스의 화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일단 끝났다.

    제2기의 휴전기간 중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직접적인 전쟁은 없었으나, 서로가 세력범위의 유지 확대를 꾀한 이른바 냉전(冷戰)의 기간이었다. 이것이 다시 ‘뜨거운 전쟁’으로 변한 것은 아테네가 시칠리아 원정을 시도하였을 때 스파르타가 이를 간섭한 때문이었다.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에서 무참히 패하여 그 후 군의 재정비를 꾀하였으나,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데켈레아를 점령, 요새(要塞)를 구축하여 아테네를 괴롭혔다. BC 405년 아테네 해군은 아이고스포타미해전에서 패하고, 또한 델로스 동맹도시들은 점차 아테네로부터 떨어져 나가 아테네는 식량난으로 시달렸다. 또한 과두파(寡頭派)에 의한 정변이 일어나는 등, 아테네는 갈수록 불리하게 되어 BC 404년 마침내 스파르타에 항복하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펠로폰네소스전쟁 [Peloponnesian War]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 BC 431 ~404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 자기 편 동맹이 들을 거느리고 싸운 전쟁 입니다.

    스파르타 승리로 끝났으나 고대 그리스 쇠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아테네는 민주정치의 스파르타는 과두정치를 각각 대표한 폴리스 였습니다. 따라서 이 전쟁은 두 정치체제의 싸움이기도 하였고, 각 폴리스 내부에서도 두 정치체제의 싸움이 계속 되었습니다.

    원인 > 댈러스 동맹을 지배라는 아테네가 횡포를. 부려 제시의 자치를 범하고 위협 하였으며 또한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반영을 시기하고 두려워하였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은 케르키라(코르푸섬)와 코린토스의 싸움에 아테네가 끼어든데 있었습니다.

    결과 > 아테네는 함대를 스파르타에 인도하고 장성을 헐었이며 델로스 동맹을 해산하고 과두정부를 만들었습니다. 패권을 잃은 아테네는 기울고 그물코는 그리스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이 아니라 문화적 중심이 되었습니다. 한편 스파르타는 패권을 장악하였으나 그것이 쇠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년 부터 기원전 404년 까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패권을 가지고

    싸운 전쟁입니다. 당시 그리스는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를 단합하여 막아내고 그들을 물리칩니다. 하지만

    당시 도시국가였던 폴리스들은 자신들이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망을 갖게 됩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겸손함을 잃어 버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치열한 내전 끝에 전염병도 겹치고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가 결국 승리했으나 그리스는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고 상당수의 인구가 죽게 됩니다.

    이것은 국력의 손실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리스의 전체 국력을 약화 시킵니다.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이 얼마나 큰 파란을 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역사를 교훈 삼아 잘 대처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