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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6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가요?

관동대지진으로 당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진과 상관 없는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어떤 경위로 학살이 일어나게 되는지 구체적인 경과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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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일본 관헌과 민간인들이 한국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를 학살한 사건을 말합니다.

    날동경과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각 경찰서 및 경비대로 하여금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라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는 한편 각 경찰서에 진상을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인 폭동이라는 명분으로 칙령이 내려집니다.

    이같은 계엄령 아래에서 군대·경찰을 중심으로, 또한 조선인 폭동의 단속령에 의해 각지에 조직된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6천여 명의 조선인 및 일본인 사회주의자가 학살되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독립신문 특파원이 조사 보고한 바에 의하면, 동경에서 752명, 가나가와현에서 1,052명, 사이타마현에서 239명, 지바현에서 293명 등 각지에서 6,661명이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학살이 가장 먼저 행해진 동경과 가나가와현에서는 군대와 경찰이 중심이 되어 행해졌고, 지바·사이타마현 등지에서는 민족배외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자경단에 의해 행해졌다고 합니다.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8.26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0년대 전반 일본은 큰 시대적 전환기에 직면합니다.

    밖으로는 코민테른의 활동이 동아시아에 미쳐 한국, 중국의 민족해방운동이 격화, 안으로는 공황으로 노동운동, 농민운동, 부락해방운동이 사회의 저변을 뒤흔들었습니다.

    여기에 일본의 군부와 국가주의자들은 과격사회운동취제법 제정을 시도하고 이들 운동에 대한 탄압의 기회를 엿보는데 이때 일어난 대지진으로 민중이 공황 상태에 빠지자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은 당면의 위기를 극복할수있는 기회라 여겨 민중의 보수적 감정을 이용합니다.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인 1923년 9월 1일 오후경시청은 정부에 출병을 요청함과 동시에 계엄령 선포를 준비, 내무 대신 미즈노, 경시총감 아카이케 등은 1일 밤 동경 시내를 일순하고 다음날 동경과 가나가와현의 각 경찰서 및 경비대로 하여금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는 한편 각 경찰서에 진상을 보고하도록 합니다.

    폭동의 전문을 준비해 2일 오후부터 3일 사이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장관뿐 아니라 조선총독부, 타이완총독부에도 타전, 전문 내용은 동경 부근의 진재를 이용해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는 등 불령한 목적을 이루려하여 현재 동경 시내에는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다. 동경에서는 이미 일부 계엄령을 실시하였으므로 각지에 있어서도 충분히 주밀한 시찰을 가하고 조선인의 행동에 대하여는 엄밀한 단속을 가해 주기를 바란다 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는 가운데 2일 오후 6시 긴급 칙령으로 계엄령이 선포, 5일에는 계엄 사령부에 의해 조선 ㅁ누제에 관한 협정 이라는 것이 극비리에 결정됩니다.

    협정내용은 조선인의 폭행 또는 폭행하려고 한 사실을 적극 수사해 긍정적으로 처리할 것, 풍설을 철저히 조사해 이를 사실화하고 될수있는대로 긍정하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 해외에는 특히 적화 일본인 및 적화 조선인이 배후에서 폭행을 선동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데 노력할 것 등을 지령해 조선인 폭동을 사실로 날조합니다.

    7일 두번이나 유산된 과격사회운동취체법안을 부활시킨 치안유지령을 긴급 칙령으로 공포, 치안을 해치는 사랑을 유포시키는 행위는 징역 10년의 중형에 처하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