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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거북이38
활달한거북이3823.07.23

일제강점기 시대의 독립운동기구인 대한광복회는 어떤 기구였나요?

일본의 침략에 맞서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위해

기구를 조직하여 일본에 대항했었는데요~

그 중에 독립운동 기구 중에 하나인

대한광복회는 어떤 기구였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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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한광복회는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박상진 등이 결성한 항일독립운동 단체입니다.

    본부는 박상진의 생가에 있었으며, 조직을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도 확대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습니다.

    또한 독립군 양성을 위해 군자금 조달과 무기 구입에 주력한 독립운동 단체였습니다.
    대한광복회의 전신은 1913년 영주에서 유림인 채기중이 결성한 대한광복단으로, 이후 1915년에는 박상진 등이 참여하여 대한광복회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집에 응하지 않는 친일부호 장승원과 박용하를 처단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918년에 일제의 탄압으로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었고, 대한광복회는 결국 조직 자체가 와해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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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한광복회는 1913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이 합쳐진 단체로, 1915년 대구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달성공원에서 결성되어 국권을 회복하고 공화제를 실현하는 것을 창립목적으로 정하고 각 도에 곡물상과 잡화상을 열어 군자금을 모으고 친일부호들을 처단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1918년 조직망이 발각되고 주요 인물들이 검거되어 조직이 크게 와해되었으나 그 후에도 일부 조직원들이 만주로 건너가 암살단,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쳤고 광복회가 결성된 달성공원은 1963년 사적 제 6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20년 8월 미의원단 방문을 계기로 임시정부와 연계해 의거를 계획하던 중 친일세력들에게 발각되어 큰 활동은 하지 못했고, 1945년 8월 해방이 되면서 광복회 정신을 되살려 건국사업에 참여하고자 재건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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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1910년 경술국치 후 3. 1.운동까지의 1910년대에 국내에 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이다.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을 중심으로 창립한 광복단(光復團)과 1915초에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鎮)을 중심으로 창립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인사가 1915년 7월 15일 통합하여 결성한 것이다. 조직은 중앙에는 박상진을 총사령, 부사령에 이석대(李奭大)를 선임하고, 부사령을 만주에 파견하여 독립군 양성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석대가 전사한 뒤에는 1917년부터 새로 가입한 김좌진(金佐鎮)이 맡았다. 각 도에는 지부를 두고 있었는데, 조직의 규모는 발상지인 경상도와 김한종(金漢種)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와 이관구(李觀求)를 중심으로 한 황해도의 조직이 컸고 활동도 가장 활발하였다.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徳泰商會)를 설립하여 본부로 하고 경상북도 영주의 대동상점(大同商店)외에 강원도삼척, 전라남도 광주, 충청남도 예산ㆍ연기, 경기도 인천, 평안북도 용천에 곡물상을 경영하며 연락처로 하였고, 서울과 황해도 해주에는 여관, 만주에는 안동의 양제안(梁濟安)이 경영한 여관과 이관구의 삼달양행(三達洋行), 장춘(長春)에 상원양행(尙元洋行)등의 잡화상을 설립하여 연락거점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상점을 거점으로 하였던 것 은 일본관헌의 눈을 피하여 군자금의 거래 등 연락이 편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영업을 통하여 군자금을 증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입한 인원을 보면, 처음에는 풍기광복단처럼 유창순(庾昌淳)ㆍ한훈(韓焄)ㆍ권영만(權寧萬)ㆍ우재룡(禹在龍) 등 의병출신자나 박상진ㆍ이관구 등 의병과 관계가 깊은 인사가 주축을 이루었으나, 조직이 전국으로 확대해 가면서 다양한 구성을 보였다. 신분으로 보아도 양반과 상민이었던 사람이 함께 어울렸고, 유학자가 있는가 하면, 유교 가정에 태어나기는 하였지만 신교육을 받아 혁신 유림의 성격을 띤 인사도 오히려 많았다. 그 가운데에도 지도층 인사인 박상진ㆍ이관구 등은 유교교육과 신교육을 모두 받고, 중국의 신해혁명에도 참여한 혁명투사였으며, 또 단군(擅君)에 대한 관심도 강한 대종교적(大宗敎的)인 민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활동 면을 보면, 처음에 계획한 것은 국내에 100개의 거점을 두고 군자금을 모아 무기를 구입하여 장비를 갖추고 독립군을 길러 중국의 신해혁명처럼 일제히 혁명을 일으켜 공화주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주에 있던 이상룡(李相龍)ㆍ허혁(許赫)의 부민단(扶民團)이나 그밖에 양기탁(梁起鐸)ㆍ신채호(申采浩) 등과도 연락하고 국내의 거점을 확대하며 혁명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때의 행동강령은 ‘비밀ㆍ폭력ㆍ암살ㆍ명령’ 등이었다. 그러한 행동강령 밑에 우선 군자금을 모으며 무기도 구입하고 있었는데, 군자금은의연금을 모으는 방법 외에 채기중은 강원도 상동이나 충청남도 직산의 일본인 광산을 습격하였고, 우재룡ㆍ권영만 등은 경주에서 우편차를 습격하여 현금을 탈취하는 등 일제의 재산을 탈취하는 강제방법으로 모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위조지폐를 만들 계획도 있었다. 그런데 군자금 수합에 부호들이 호응하지 않아 뜻과 같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 뒤부터 대한광복회는 식민통치에 안주하는 부호들을 상대로 강제모금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17년부터 각 도별로 부호명단을 작성하고 ‘광복회’의 명의로 모금액수를 표시한 고지서를 발부하였고, 불응시에는 처단된다는 뜻도 밝혔다. 이러한 고지서를 받고 모금에 호응한 사람도 있었지만, 고발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중에서 친일성이 강한 대표적 부호를 처단하기로 하고, 1917년 말과 1918년 초에 걸쳐 경상북도 칠곡군 부호 장승원(張承源),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 전라남도 보성군의 양재학(梁在學)과 낙안군의 서도현(徐道賢)을 처단하였다. 이로 인하여 광복회의 소문이 전국에 퍼져 민족적 각성을 일으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와 같이 처음에 혁명단체로 출발한 대한광복회가 1917년 말부터는 의열투쟁 단체로 전환해 갔다. 그러다가 1918초에 전국의 조직망이 발각되어 박상진ㆍ채기중ㆍ김한종 등은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으며, 그밖에 수많은 인사가 옥고를 겪어야 하였다. 이때 만주에서 활약하다가 발각되지 않은 우재룡을 비롯하여 권영만ㆍ한훈 등은 그 뒤에 암살단이나 주비단(籌備團)에서 활약하였고, 황상규(黃尚奎)ㆍ김상옥(金相玉)은 암살단을 거쳐 의열단에서 활약하다가 모두 장기의 옥고를 치르거나 순국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0 년대에 아직도 복벽주의 독립운동이 많던 때에 공화주의 이념을 표방함으로써 민족주의를 발전 시킨 점과 그 의열투쟁은 암살단ㆍ주비단ㆍ의열단으로 이어져 독립운동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등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출처 : 21세기 정치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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