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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05.06

진성여왕은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안녕하세요? 신라시대 마지막 여왕 진성여왕은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그 시기에 왕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는 혼란의 시기였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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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6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녀는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과 문의왕후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오빠는 헌강왕과 정강왕이었다. 그런데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이 갑자기 죽자, 아들이 아직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동생인 정강왕이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 또한 1년 만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 이때 왕위 계승 1순위는 경문왕의 동생인 상대등(上大等) 위홍(魏弘)이었다. 그런데 정강왕은 상대등이 아닌, 시중(侍中) 준흥(俊興)에게 자신의 유언을 남겼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여동생 만(曼)이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골상(骨相)이 장부와 같으니 옛날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과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의 고사를 따라 그녀를 임금으로 받들라고 했다. 정강왕의 유언 탓에 그녀가 임금이 되기는 했지만, 신라사 전체에서 본다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왕위에 오른 것은 경문왕의 자손들만으로 왕위를 계승하기를 바라는 세력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성여왕의 즉위에 있어서 다른 귀족들의 반대는 거의 없었다. 신라 후기 치열한 왕위 계승 다툼으로 인해 국력이 쇠퇴해진 것을 경험한 탓인지, 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이후에는 왕위 계승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진성여왕은 또한 왕위를 넘볼 수 있는 숙부 위홍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선덕, 진덕여왕 시기보다도 진성여왕 때의 왕권은 안정적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성여왕 [眞聖女王] - 신라 멸망의 원흉으로 비판 받는 신라 51대 왕 (인물한국사, 김용만,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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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성여왕은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딸로 태어났고 그녀의 오빠는 헌강왕과 정강왕이었는데 헌강왕이 갑자기 죽자 아들이 아직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동생인 정강왕이 왕이 될수있었는데, 정강왕도 1년 만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이때 왕위계승 1순위는 경문왕의 동생인 상대등 위홍이었으나 정강왕은 상대등이 아닌 시중 준흥에게 유언을 남기기를 자신의 여동생 만 이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골상이 장부와 같으니 옛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고사를 따라 그녀를 임금으로 받들라고 합니다.

    정강왕의 유언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녀가 즉위할 당시 신라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으로 지방에서 호족들이 자립하고 반란 세력들이 차츰 등장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즉위 후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고 주, 군에 1년동안 조세를 면제시켜 주기도 했고 황룡사에서 백좌강경을 설치하여 설법을 듣는 등 불교를 통한 민심을 수습하려 했으며, 상대등 위홍을 시켜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해 정리한 삼대목을 편찬케 했습니다.

    그러나 진성여왕은 상대등 위홍의 죽음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에 흥미를 잃게 되고 음란하고, 신라의 멸망의 원흉이라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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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가 통일한 후로 100여 년이 지나도록 나라에 큰 위기가 없다가 혜공왕의 시대에 이르러 왕이 음악과 여색에 깊이 빠져서 즐기고 희롱함이 도를 넘어섰으며, 기강이 문란하여져서 인심이 등을 돌렸습니다. 이에 김지정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자 김양상이 김지정을 주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으니, 이가 선덕왕입니다. 애장왕의 시대에는 왕의 숙부인 김언승이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습니다. 또 김명이 희강왕을 시해하자 김양이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청해진 지금의 완도에서 병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때에 청해진 대사 장보고가 병사 5천 명을 그 친구인 정연에게 주어서 김양을 돕게 하니, 김양이 밤낮으로 행군하여 달벌구 지금의 대구에서 김명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달아나는 무리를 추격하여 가서 목을 벤 후에 신무왕 김우징을 맞아들여 즉위시켰습니다.

    문성왕 이후로는 반역이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그 주모자를 모두 주살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당시에는 임금과 신하들이 편안하고 한가롭게 노닐면서 음악과 시부를 이야기하며 서로 칭찬할 뿐 삼가고 두려워함이 없어서 겉으로는 평안하여 보였으나, 안으로는 모두 부패하였습니다. 진성 여왕이 즉위함에 이르러서는 왕이 음탕하고 문란하여 어리고 잘생긴 남자들과 몰래 사통하고 이로 인하여 그들에게 요직을 제수하였으니, 아첨하여 총애를 얻는 자들이 그 뜻을 이루어 기강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또 주군에서는 세금을 납부하지 않아 나라의 곳간이 고갈되었고, 곳곳에서 도적떼가 일어났으니 원종과 애노 등은 사벌주 지금의 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양길과 궁예는 북원지금의 원주에서 모반하였습니다. 견훤은 완산지금의 전주에서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사방이 어지럽고 강역이 날로 줄어들어 신라의 국운은 실과 같이 가늘게 겨우 유지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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